[인터뷰] 황인석 전 전국농민회총연맹 경북도연맹 의장

진솔하게 써낸 농민운동가의 삶

  • 입력 2017.03.17 11:02
  • 수정 2017.03.17 11:08
  • 기자명 한우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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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한우준 기자]

“정말 훌륭했던 사람들인데 전부, 같이 농민운동 했던 사람들부터 나를 도와준 옆집 이웃들, 그리고 아내까지 전부 말이야. 헌데 죽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아서 나는 그게 참 아쉬웠어.” 황인석(62) 전 전농 경북도연맹 의장이 얼마 전 출간한 책 ‘농부가 품은 세상’ 얘기다. 그의 회고록은 함께 길을 걸었던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으로 가득 차 있다. 

 

경북 농민의 대변인으로 보낸 젊음

“흔하게 연대보증 섰다가 망하는 사람들, 빚 때문에 허덕이는 사람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정권 박수치고 있고. 농민 문제에 농민들이 관심을 안 가지고 있다는 건 지금도 참 불행한 일이지.”

1980년대 후반 수세 거부 투쟁 시절, 황 전 의장이 사는 상주시 모동면에 농민회 면 지회가 창립됐고 그도 가입하며 본격적으로 농민운동에 뛰어들었다. 상주시농민회장을 거쳐 도연맹 의장까지 역임한 그는 수입 농산물 개방과 농가부채 문제 해결을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막는 쪽도 마찬가지기는 하지만, 무조건 강경 일변도로 가는… 대화가 생길 수 없는 투쟁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지. 구체적인 대안도 제시할 줄 알아야 하고, 저쪽에서 내미는 절충안을 어느 정도 받아들일 준비도 미리 하고 있어야지. ‘당장 네 세상을 줄 테니 농협을 네 마음대로 해 봐라’ 누가 이렇게 떠 밀어주면 이상적인 농협을 쉽게 만들 수 있을까? 우리도 준비를 못했으면서 왜 너네는 준비를 못했느냐 따질 수는 없는 거지.”

황 전 의장은 농민운동을 하며 대립각을 세우던 공무원들과 농협으로부터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물론 그렇다고 무르게 투쟁한 건 아니다. 대규모 집회 성사를 위해 경찰에는 평화 집회를 약속하는 대신 병력을 멀리 철수하게 하고, 인원 수송을 위한 버스 대절 비용 문제는 농협의 협력을 이끌어 내 해결하는 등 크고 작은 투쟁을 연이어 성사시켰다.

잠시 지도부를 벗어나 있던 시기에도 농민회원들이 농협과 대화가 안 된다며 찾아오면 대신 일을 해결하기도 했다. 그러나 때로는 전면에 나서고 때로는 대화를 성사시켜야하는 역할에 늘 마음고생이 컸다.

“돌이켜보면 저쪽 사람을 그렇게 몰아가지 말아야하는데… 하는 생각이 든 적도 몇 번 있지. 투쟁을 하다 감정이 격해지면 마찰에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경우가 많았어. 그래도 농민회를 보호하는 게 우선이니까. 앞으로 나설 때엔 누군들 겁이 안나나. 잡혀갈 수도 있는데… 속으론 두렵지만 책임감을 느끼며 아닌 척 했지. 오히려 옆에 있던 사람들이 더 당당하게 일으켜 세워 준 경우도 많았어. 고마웠지.”

 

이제는 백화산 알리미로

농민운동 일선에서 물러난 황 전 의장은 포도농사에 전념하는 한편 백화산을 알리는 일에 힘을 쏟았다. 그의 집 뒤에 배경으로 자리한 백화산은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민중들의 혼이 깃든 곳이다. 고려 때 몽고 차라대가 이곳 상주성을 침공했을 때, 민중들이 맞서 싸워 적의 절반을 도살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뿐인가.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주변의 민초들이 한데 모여 의병진을 창설한 곳도 바로 여기 백화산 고모담이지. 그래서인지 일제시대 땐 지도에서 아예 산 이름이 지워졌어.”

역사를 듣고 나니 이곳에 사는 농민운동가라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상주시민들과 함께 지난 2007년 ‘백화산을 사랑하는 모임’을 만들어 사무국장을 맡았고, 오랜 노력 끝에 지난 2013년 백화산 입구에 항몽대첩탑을 세우는데 성공했다. 건립기념비 고유제는 헬기까지 동원한 시의 지원 속에 성대하게 치러졌고, 750년 전 민중항쟁의 역사는 그렇게 세상 앞에 다시 서게 됐다. 백화산을 알리기 위한 활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은혜도 갚지 못하고 떠나보낸 아내

“항상 미안했지 뭐. 집에 붙어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으니까. 밤늦게 집에 들어오면 다 잠든 줄 알았던 애들이 깨고 울고… 어느 정도 시기가 지나면 그런 미안한 거 다 갚고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그렇게 가버리고 말았지.”

아내 이야기를 꺼내자 표정이 어두워진다. 황 전 의장은 지난 2003년 아내 김진자씨를 잃었다. 갑작스런 지병 악화로 손 쓸 새도 없이 다가온 아내의 죽음은 그에게 감당할 수 없는 죄책감을 안겼다.

“아내가 죽고 나서 유품을 정리하니 가졌던 게 아무 것도 없는 거야. 그 흔한 금붙이 하나 없었어. 그나마 몇 개 있었던 것은 IMF 때 나라 어렵다고 팔았지. 애 엄마가 싫어했는데도….”

아내가 남긴 것은 일년에 몇장씩 일기를 기록한 낙서장이 전부였다. 남편은 그것을 읽고 나서야 그저 지난 세월 자기 삶의 방식을 따르도록 강요했을 뿐 아내가 무엇을 원하고 느끼는 지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가슴을 쳤다.

정부와 맞서는 남편이 걱정되어 애를 태우면서도 결국은 그의 싸움을 막지 않았던 아내였다. 지난 1998년, 5,000명의 경북 농민 앞에서 진행된 지도부의 삭발식을 막기 위해 단상 위까지 뛰어 올라왔다가 결국은 남편의 눈빛을 보고 물러났다는 일화는 고 김진자 씨가 가졌던 심정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아내의 죽음은 황 전 의장이 책을 쓰기로 결심을 굳힌 계기가 됐다. 농민운동가로 지낸 한평생, 아내를 돌보지 못했던 회한을 영전에 바쳐 그 영혼을 조금이라도 위로 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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