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칼럼] 3월 10일, 그날

  • 입력 2017.03.12 10:56
  • 수정 2017.03.12 11:02
  • 기자명 부석희(제주시 구좌읍)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부석희(제주시 구좌읍)]

부석희(제주시 구좌읍)

1948년 4월 3일, 제주 4.3은 오름마다 붉은 봉화가 타오르면서 항쟁의 시작을 알렸다.

1947년 3.1절 기념행사가 관덕정 부근에서 열릴 당시, 기마경관이 탄 말에 어린아이가 말굽에 채였고 그냥 가버리는 것에 화가 난 시위대가 거세게 항의를 하던 도중에 경찰의 발포가 있었다.

그리고 현장에서 6명이 숨을 거두게 된다.

미군정과 경찰은 시위대 주동자와 학생들을 마구 잡아들였고, 화난 제주 민심은 제주도청 등 관공서는 물론 경찰 까지도 전도적인 총파업에 참여하는 데 이르렀다.

 

그해 3월 10일은 역사적으로 유례를 찾아보지 못하는 제주도민 총파업으로 민관 할 것 없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날이다. 제주에서 스무번째로 모아지는 촛불은 70년이 지난 2017년 3월 10일 거라고 점쳐본다.

“형님이 아니더라도 탄핵은 됩니다. 일이나 헙써”. 내가 좋아하는 후배들이 툭 건드는 말을 한다.

“너네들도 한번은 가야지, 너무 하는거 아니냐…” 하면 다들 미안한 웃음을 짓고 있다.

열심인 나로서도 하우스 일에 매달린 아내와 직장을 찾아 나선 두 딸과 같이 한 것은 한번 뿐이다.

그러고도 협박은 계속 한다. “남자친구가 촛불에 안오면 사귀지마” 라고.

아무리 바쁘고 고단한 청춘들이라지만 설마 스무번에 한번은 나오겠지.

사실 나도 뒤끝이 꽤 있는 인간이다.

제주시청에는 백남기 어르신의 어이없는 죽음으로 들었던 농민들의 촛불에 어느새 모여든 수만의 사람들로 채워지고 있다.

누가 안보이면 섭섭해지는 친구들처럼 반갑게 눈인사를 나눌 정도가 되었다.

 

그런중에 17차 촛불집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길에 교통사고가 났다.

나를 꼭 태워가고 사물놀이 패에서 징을 치시는 경대 형님이 피곤한지 깜빡 졸아서 밭으로 차를 돌진해 버린 것이다

그 덕에 척추수술을 하고 2주 넘게 병원에 누워 있다. 조금 다친 나는 미안해 죽겠는데, 형님은, “석희 아우는 농사일이며 이것저것 힘쓸 일이 많은 사람이라 다치지 말아야 하고, 나는 사진이나 찍고 다니는 사람이라 더 다친 모양이다”라며 되레 위로를 주신다.

“박근혜가 탄핵되는 날엔 형님이 막걸리 자리에 오셔야 분위기가 살지, 아파도 옵써….”

 

제주의 소문난 찬바람에도 온몸이 젖게 비가 오던 날도 촛불은 광장에, 대학로 거리에, 행진 차로에 꺼지지 않고 있는 것은 서로에게 힘을 주고픈 마음일거다.

뜨거운 커피, 어묵, 그리고 초컵이며 여러 정성을 모두가 함께 준비하고 끝까지 마무리 하는 촛불광장이 기다려진다. 그리고 꼭 나 닮은 누군가를 보고 싶다.

나 혼자 무슨 힘이 있겠냐마는, 오늘도 터벅 그 길을 가야 한다.

그 걷던 길에 꼭 너 닮은 누군가가 같이 하리니 걱정말고 그 길 끝에 가서 막걸리 한잔 나누세.

촛불 하나 가슴속에 담고 사는 친구들에게 “몸 잘 간수하시라” 다시 또 보자고 되뇌어 본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