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양목을 아시나요?

금강송 ‘춘양목’에 빠지다, 봉화농민 류승하씨

  • 입력 2017.02.24 14:31
  • 수정 2019.05.01 16:03
  • 기자명 심증식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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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

겨울 끝자락에 경북 봉화군 춘양면으로 가는 길은 4~5개의 고속도로를 경유해야 했다. 고속도로 끝인 영주에 다 다랐다. 영주에서 봉화까지 20분 그리고 봉화에서 춘양면 석현리까지는 다시 20분을 달려야 한다. 봉화에서 춘양으로 가는 길은 굽이굽이 산길이다.

지금은 도로가 나고 차로 다녀 깊은 산골 같이 느껴지지 않지만 백두대간 중앙에 위치한 깊고 깊은 산골 마을이다. 드디어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 춘양목농원에 도착했다. 춘양목농원 대표 류승하씨는 하우스 안에서 솔방울을 손질하고 있었다.어제 

“이게 춘양목 솔방울입니다. 천연 가습용으로 솔방울을 찾는 분들이 많아졌어요. 이 솔방울은 산에 떨어져 있는 솔방울이 아니라 지난 가을에 소나무에서 따다 놓은 것이라 깨끗해요. 여기서 씨앗을 받고 솔방울은 천연 가습용으로 또는 공예품 재료로 판매하고 있어요.” 춘양목농원에서 겨울에 취급하는 것 중 하나가 솔방울이다.

춘향목이라 하면 금강송의 한 종류로 한옥을 짓는데 사용하는 목재로 알려져 있다. 2008년 숭례문이 화재로 소실돼 복원을 할 때 춘양목에 대한 이야기가 언론에 자주 오르내렸다. 특히 봉화에 사는 어느 분이 100년 된 춘양목 한그루를 숭례문 복원에 쓰라고 기증한 일도 있었다. 시가로 1,000만원이 넘는 나무라 했다. 우리는 그렇게 춘양목을 건축용 목재로 알고 있었다.

춘양목농원을 운영중인 류승하씨가 지난 21일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에 위치한 농원 하우스에서 지역의 상징과 같은 춘양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춘양목이 뭐죠?

“금강송이예요. 1920년대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 당시 전쟁과 광산개발로 나무 수요가 많았어요. 춘양목재주식회사가 이 근처에 있었어요. 봉화 인근 백두대간에서 나오는 소나무를 공급했는데 품질이 좋다고 소문이 난 거예요. 춘양목재주식회사 나무가 좋다는 것이 끝에 주식회사는 떨어져 나가고 ‘춘양목이 좋다’ 이렇게 알려지면서 이곳에서 나는 금강송을 춘양목이라고 부르게 됐죠.”

류씨가 춘양목을 키우기 시작한 것은 15년 전이다. “이곳이 제 고향이예요. 학교를 마치고 직장생활도 하고 사업도 했어요. 그런데 저는 도시에서의 생활이 안 맞았어요. 경쟁도 잘 안되고…. 그래서 5년 만에 고향으로 내려왔어요.”

도시 생활을 하다가 농촌에 간다고 하면 첫 번째 난관이 아내의 반대이다. 그러나 그의 경우 아내가 적극 찬성을 했다. “집사람이 적극 찬성했죠. 우리 집사람이 굉장히 착해요. 시골에 내려와 시부모 모시고 20년간 잘 살았죠, 그런데 6개월 전에 아내가 농막으로 독립을 했어요. 이제 혼자 살아 보고 싶다고…. 자신만의 벙커를 꾸민 거죠. 그런 것도 필요한 거 같아요.”

막상 고향에 내려왔지만 농사 역시 만만치 않았다. 한편 반복적으로 하는 일에 대한 답답함도 생겼다. 좀 더 새롭고 의미를 갖는 일은 없을까 고심하게 됐고, 농사가 꼭 먹는 것을 생산하는 것이어야만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다른 꿈을 꿔보자, 다른 가치를 찾아보자, 하면서 새로운 고민을 했다고 한다. 그때 전국적으로 소나무 바람이 불었다. 그래서 이 지역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춘양목을 키워보자고 마음먹었다.

“춘양목 자체가 굉장히 유명한 이미지잖아요. 춘양목을 통해서 지역과 내가 같이 발전할 수 있을 거 같았어요. 춘양목과 내가 운명공동체라고나 할까. 그래서 춘향목을 선호하는 문화를 어떻게 만들까 이런 고민을 하게 됐어요. 소나무 씨앗을 받고 뿌려서 묘목을 키웠어요.”

류씨가 농원에서 자라고 있는 춘양목을 어루만지며 미소짓고 있다.

한편으로는 씨앗나누기 활동도 시작했다. 소나무 씨앗을 받아서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나눠줬다. “춘향목을 전국적으로 알리고 보급하기 위해서 씨앗나누기를 했어요. 제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심을 수는 없고 반송봉투를 보내주면 씨앗을 100알씩 무료로 보내주는 방식으로 많은 분들이 받아갔어요. 우리나라 사람 정서와 소나무가 딱 맞는 거 같았요. 외국에 나가신 분들도 씨앗을 보내달라고 할 정도로 반응이 좋았죠. 한 5년 정도 했어요.”

처음에 가장 큰 난관은 소나무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과 판매였다. “소나무에 대한 정보와 연구가 많지 않아서 우리나라하고 일본의 논문을 모두 찾아보면서 공부를 했어요. 워낙 소나무 전문가가 없어서 이제는 제가 손꼽히는 소나무 전문가가 됐어요.”

무엇보다 묘목 판매처를 만드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문제였다. “판매가 가장 큰 난관이었어요. 묘목을 키워놓고 여기저기에 홍보를 했지요. 묘목 한주에 200원씩 판다고 알렸고, 가격이 싸니까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1만주씩 주문에 들어오는데 1만주래야 라면박스 1개 정도 분량이거든요. 승용차에 한 차 싣고 가면 제법 돈이 됐지요. 그렇게 묘목을 팔고 남는 거는 다음해에 2년생 묘목으로 팔고, 그 다음해는 3년생으로….”

묘목은 주로 산불이 난 곳이나 간벌을 한 곳 그리고 수종 갱신용으로 판매됐다. 처음에는 판매처를 만드는 것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지만 지금은 수요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라고 한다.

“소나무 재선충의 영향으로 소나무의 전체적 수요는 줄었어요. 그런데 공급자는 그보다 더 급격히 줄었어요. 시장의 공포하고나 할까. 그러다 보니 공급하는 곳이 우리하고 몇 곳 안 돼요.”

류씨는 소나무 말고는 다른 농사를 전혀 짓지 않는다. 아내가 텃밭에 먹을 채소를 심으려 해도 못 심게 한다.

“교류하는 이웃 농민들에게 가져다 먹어도 충분한데 따로 농사를 지을 필요가 있나요. 지역화폐라는 것도 있잖아요. 자기가 잘하는 것 하고 나머지는 교환해서 먹는 방식으로 농사도 전환했으면 좋겠어요. 여기는 사과가 유명해서 이웃 농민의 50%가 사과 농사를 해요. 그러다 보니 사과 농사하는 사람들끼리는 교환할 수가 없고, 보이지 않게 서로 경쟁을 하게 됩니다. 겉보기에는 평화롭지만 그 안에는 차이가 심해요. 격차가 생기면 정책은 잘하는 사람 위주로 지원을 하고 그러면 못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 악순환이 되는 거예요.”

농촌사회에 나타나는 경쟁의 폐해를 정확히 지적한 이야기이다. 언젠가부터 경쟁력 경쟁력하면서 외부와의 경쟁으로 시작해서 내부의 경쟁으로 귀결되는 현상을 목도하고 있다. 그로 인해 농촌공동체는 이렇게 조금씩 균열이 생긴다.

“제가 소나무를 시작한 이유 중에 하나도 이러한 경쟁에서 벗어나자는 거였죠. 이쪽은 워낙 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일본의 소규모 분재공원처럼 춘양목으로 꾸민 정원공원을 만드는 게 목표라는 류씨가 춘양목 묘목을 들고 밝게 웃고 있다.

“춘양목으로 꾸민 정원공원이 목표”

소나무를 키우기 시작하면서 처음 5~6년간은 봄에 1년 쓸 돈을 벌어야 한다 생각했다. 나무를 심는 것이 봄에 주로 이뤄지니 수요가 봄에 몰리기 때문이다.

“봄이 되면 남자 10명 여자 6명을 고용해서 작업을 했어요. 하루에 200만원 가까이 비용이 들어갔지요. 그렇게 일을 하다보니까 효율적이지 않았어요. 많은 인력을 운용하다 보니 인력 낭비도 있고, 때로는 사고도 나고, 인력 낭비를 줄이려고 작업을 많이 하면 판매를 다 못해서 버리는 경우도 생기거든요. 그리고 한 5,000만원이면 1년 쓰겠지 했는데 봄에 벌어 놓은 걸로 1년을 써보니까 돈을 더 쓰게 되더군요. 그래서 매출이 줄더라도 연중 매출이 일어나도록 사업형태를 바꿨어요.”

초기 봄철 묘목과 정원수 중심에서 지금은 상시에 판매하는 방식으로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여전히 묘목과 정원수가 매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 하지만 공급물량을 조절해서 사철 공급하는 체계를 갖췄다. 상품 고민도 많이 한 끝에 20여개의 제품을 다양한 경로로 판매하고 있다. 묘목, 조경수, 전원주택의 조경설계와 조성, 솔방울, 씨앗, 솔잎 등 소나무의 모든 것을 판매하고 있다.

“제가 농사를 잘못해서 그런지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요.” 행복한 고민이다. 류씨는 지역에서도 열심히 활동을 하고 있다. 오래전부터 정보화농업인회 활동을 하고 있으며 2년 전부터는 농민회에 가입해서 활동을 하고 있다. 지금 봉화군농민회 춘양면지회 회장을 맡고 있는데 농민회 활동은 어떻게 하게 됐는지 궁금했다.

“정보화농업인회 활동을 하며 오랫동안 회장을 했어요. 그러다가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으면 발언도 하고, 내 이야기가 사회에 들려질까 이런 고민을 하게 되면서 농민회가 추구하는 가치도 중요하고 의미가 있다는 생각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농민회의 가치와 정보화농업인회의 실용적 것을 접목시키면 농민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거죠. 들어와서 활동해 보니까 밖에서 보는 것만큼 괜찮은 가치이고 나하고도 잘 맞았어요. 춘양면지회장이요? 조직이 작으면 승진도 빠르잖아요.”

류씨는 농민회 가입 2년 만에 춘양면지회장이 되었다. 지역사회에서의 좋은 평판과 농민회에서의 적극적인 활동이 빚어낸 결과가 아닐까.

그는 예술가적 재능과 기질이 있는 사람이다. 한때 유리공예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심미안을 갖고 있기에 춘양목에 천착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류씨에게는 춘양목을 키우는 것이 예술작품을 만드는 과정인 것이다.

“이 일이 저한테는 잘 맞아요. 하루 종일 나무를 다듬고 모양을 만드는 일들이 즐거워요. 그리고 나무를 다듬고 모양을 만드는 일은 항상 새로워요. 사람마다 보는 눈이 다르다보니 정형화된 게 없어요. 일반 농산물처럼 어떤 크기와 모양을 만들어야 하는 것도 아니에요. 제가 아무리 열심히 가꾸고 정성을 들인다 해도 손길 닿지 않고 스스로 자란 나무가 훨씬 잘 크는 경우가 많거든요.”

류씨는 춘양목을 통해서 겸손함을 익힌 것 같다. 스스로를 게으른 농부라 칭하며, 아등바등하지 않고 순리대로, 무리하지 않고 함께 어울리며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앞으로 계획은 소박하지만 춘양목과 지역 그리고 본인의 운명공동체를 보여주고 있다. “정원공원을 만들고 싶어요. 규모가 크지 않아도 춘양목으로 꾸면 놓은 정원공원이요. 일본에는 소규모의 분재공원이 많이 있어요. 500평 정도의 규모지만 유명한 분재공원이 있어요. 저도 이곳에 그런 공원을 만들 거예요. 밭에 나무를 캐낼 때도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작업을 해요. 춘양목 정원공원이 우리지역을 알리고 키우는데 큰 역할을 할 거예요. 그때 다시 놀러 오세요.” 춘양목은 이 지역을 대표할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소나무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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