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여덟 농부의 ‘꼼꼼한’ 영농일지

제주서 당근 농사짓는 백의통씨

  • 입력 2016.12.25 21:53
  • 수정 2017.08.28 10:01
  • 기자명 심증식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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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제주시 구좌읍 평대리의 자택에서 만난 백의통씨가 직접 써 내려간 영농일지의 꼼꼼함에 놀란 취재진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로 답하고 있다. 그의 옆에 놓인 책상 위에도 갖가지 자료가 잘 정돈돼 있다. 한승호 기자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

제주도 제주시 구좌읍 평대리에서 당근 농사를 짓고 있는 백의통씨를 찾았다. 1939년생 78세, 그 세대의 사람들이 모두 그러하듯 백씨의 삶엔 우리 근대사의 질곡이 그대로 담겨있다. 백씨는 일본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이름도 특이하다. 일본에서 지은 이름 ‘히로야마 요시미치(白山 義通)’의 한글식 발음이다.

아버지 고향은 제주, 아버지는 일제 때 일본 오사카에 건너가서 생활을 했고 백씨가 9살이 되던 해 해방과 더불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해방된 고국에 돌아온 아버지는 2년만에 4.3항쟁 희생자가 되었다. 이후 홀어머니와 어렵게 살아왔다.

1972년 제주 구좌농협 창립 멤버로 활동하다가 농협에 들어가 일을 하게 되었다. 25년간 농협근무를 하고 1997년 정년퇴직을 하면서 본격적인 농사를 시작했다.

“농협에 다닐 때도 농사는 지었어. 어머니와 아내가 주로 농사를 하고 주말에 도와주곤 했지. 농협에서 정년퇴직하면 당연히 농사짓는다고 생각했지만, 어이쿠야 직접 농사를 지어 보니 쉽질 않았어.” 

농사지은 이야기가 나오니까 옆에 앉아 있던 부인 김명순씨가 거들었다. “처음에는 농사를 잘 모르니까 거름도 조금 주고, 내말은 안 듣고 해서 많이 다퉜어.” 평소에도 농사를 해 왔기 때문에 농사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부인과 다투는 일도 잦았다고 한다.

농사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농사를 짓는 것도 어려웠지만 가격이 안정되지 않아 항상 불안이 동반했다. 궁리 끝에 내린 결론이 친환경 농사였다.

“당근 값이 계속 하락하니까 점점 농사짓기가 힘들어지는 거야. 그래서 친환경 하면 값이 더 낫겠지 하고 2010년부터 친환경 농사를 짓기 시작했지.”

이때부터 백씨는 영농일지를 쓰기 시작했다. 친환경 인증을 받으려면 영농일지를 작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영농일지는 백지를 철해서 만들었다. 겉표지를 넘기면 가지런한 글씨가 빼곡하게 또 꼼꼼하게 쓰여 있다.

백씨와 부인 김명순씨가 집 앞 당근밭에서 함께 우산을 쓰고 미소 짓고 있다. 한승호 기자

올해는 제주의 월동채소 재배 농민들에게 고난의 한해였다. 여름의 긴 가뭄으로 당근과 무의 발아가 안 돼 두 번 세 번 다시 파종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씨를 뿌리는 것이 때가 있는 것이고 특히 가을 파종의 경우 파종시기 하루 차이가 수확시기 1주일 차이가 난다고 할 정도로 적기 파종이 중요하다. 그러나 가뭄 소나기 태풍 잇따른 자연재해로 농민들 속이 까맣게 탔다. 백씨의 영농일지에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적혀 있다.

8월 6일(토) 맑음 후 소나기 약 북동 동풍 弱
황토왓밭(평대리2487번지) 2,000평 당근파종
•유기질비료(웰빙) 200포, 참편한유기질비료 100포, 랜드세이버 100kg
•종자 : 베니스타 8캔 
•파종기 운전자 : 김** (인건비 : 차후 정산)

8월 7일(일) 맑음 북동 동풍 弱 (표1 참고)
•파종기 운전자 : 김**  
•인건비 차후정산
•베니스타 당근종자 3캔 구입처인 세화농약사에 반품

8월 19일(금) 맑음 맑은 후 오후 6시부터 소나기 북동 동풍 弱
농든나머새밭 650평, 한거밭 750평, 당근재파종 
•종자 : K세븐 4포1/2 
•경운자 : 김** 인건비 : 차후정산

8월 23일(화) 맑음 북동 동풍 弱
농든나머새밭 650평, 한거밭 750평, 당근밭 8월 19일 깜짝 소나기로 파종한 땅이 굳어버리고 쪼개져 발아가 안될 것 같아 3차 파종 
•종자 K세븐6개(포) 
•구입처 : 구좌농협자재과 
•경운자 : 김** 경운료 : 차후정산

“올해 초벌은 거의 없어. 재벌에 세벌까지 한 사람이 많아. 우리도 세벌씩 뿌렸어. 그런데 초벌이나 재벌이나 생육상태는 거의 비슷해, 가물어서 일찍 씨를 뿌린 것도 크질 못했어.”

제주에서 당근 파종은 통상 7월말에서 8월초에 한다. 영농일지에는 8월 6일 2,000평, 8월 7일 2,690평의 밭에 당근 씨를 파종했다. 그러나 가뭄으로 발아가 되지 않아 이 중 1,400평엔 8월 19일 재 파종한다. 설상가상 파종 후 소나기로 인해 땅이 굳어지고 갈라져서 23일 세번째 당근 씨를 뿌린다. 한숨 돌리던 차에 10월 5일 태풍 차바까지 휩쓸고 지나간다. 이날 영농일지에는 아래와 같이 쓰여 있다.

10월 5일(수) 비 내리다가 午後부터 맑음 북서 서풍 매우 强
아침 3시부터 제18호 태풍 차바(CHABA)가 비를 동반하고 매우 强하게 몰아치다 午後들어 맑아졌으나 바람은 다소 弱해졌다. 당근 밭마다 밭 주위 돌담이 군데군데 허물어지고 당근은 뽑히고 쓰러지고 생육이 부실할 것 같다.

결국 태풍 차바로 인해 2,000평의 당근은 농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무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 500만원을 받고 임대를 주었다. 

백씨는 농기계가 없다. 집에 트럭이 한 대 있는데 이것도 아들이 농사를 돕기 위해 사놓은 것이라고 한다. 몇 년 농사를 돕던 아들도 농사는 어렵다면서 농사지을 생각이 없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기계일은 모두 사서 할 수밖에 없다. 밭을 갈고, 로터리 치고, 당근 씨를 파종하고, 농약을 치는 일은 모두 인근 농민들의 도움을 받는다.

친환경 농사를 짓다보니 백씨가 하는 일이란 대부분 제초작업이다. 부인 김명순씨는 매일 밭을 매는 일에 매달리다 보니 이제 닳고 닳아 불편한 무릎만 남았다.

친환경 당근 농사를 짓는 백씨가 2016년 한 해 동안 적은 영농일지(왼쪽). 영농일지를 펴 보자 농사와 관련된 모든 사항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한승호 기자

4월 12일(화) 맑음 남서서풍 弱
도롯밭(850평) 어제 잡초 뽑다 남은 500평 정도 손으로 잡초제거 작업하고 마무리.
•작업인원 : 2명 부부 
•인건비 : 미지급 밭주인부부

6월 16일(목) 흐림 구름 북서 서풍다소 强
•황토왓밭 2,000평 도롯밭 850평, 면적에 잡
초 제거하기 위하여 트랙타로 로타리 경운 
•경운자 : 김** 
•경운료 차후 합산후 지급키로 함.

이뿐 아니라 영농일지에는 각종 농자재의 구매내역과 영농교육 참여 내용을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3월 9일(수) 맑음 북 북서풍 다소 强 
•친환경 「GCM농법」 현장 적응 실천 교육
•시간 : 10時부터 6시간
•교육주관 : 제주특별자치도 농업기술원 동부농업기술센터 
•장소 : 동부농업기술센터
•교관 : 전남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응용생물공학부 김** 교수
•전화번호 010-****-**** 062-530-****

6월 30일(목) 맑음 남동남풍 다소 强
•집옆밭 360평 밭서쪽 밭담 주위에 비산 방지용 파이오니아 식재
•병충해관리용 유기농자 구입 제조회사: (주) ** 바이오 인증번호 : 2-2-*

그의 영농일지에는 날씨, 바람, 작업내용, 농자재 구매내역, 인력, 농기계 사용 내역 및 작업자 이름과 비용 지급 여부 그리고 참여한 영농교육의 내용과 강사의 전화번호까지 철저할 정도로 꼼꼼히 기록해 놓았다.

영농일지를 통해서 백씨의 1년 농사를 살펴보면 어느 농민과 다름없이 팍팍한 농민들의 형편을 알 수 있다. 지출내역은 아래와 같다.

1.  경운료 및 기타 사용료 2,250,000원
2.당근 솎음 및 잡초 뽑는 작업인건비 4,048,000원
3. 당근 채취 및 출하시 인건비와 기타잡비 6,798,410원
4. 친환경 유기질비료 농약및 당근 종자대 합계액 10,796,545원
5. 판매 선도금 상환  7,500,000원
6. 당근 Box운송료와 톤백 공제금 1,454,000원

합계 3,284만6,955원, 여기서 선도금 750만원을 뺀 2,534만6,955원이 2015년 영농비의 총액, 지출총액이다. 그리고 2015년 출하대금 합계는 3,758만4,122원. 지난해 그의 농사 수입은 1,223만7,167원이 된다. 부부가 5,000평 당근농사로 올린 1년 소득이다. 이것도 농지가 전부 ‘내 땅’이라 가능한 수익이고, 임차료를 낸다면 이마저도 어림없다.

“적자는 아니지만 상당히 어려웠어. 친환경이라고 가격을 사전결정하면 끝이라. 가격 내릴 때도 안 내리지만, 가격이 올라도 우리는 그대로니까 많이 아쉬워. 그래서 친환경 그만두는 사람들이 있어. 올해 친환경 당근 지난해보다 좀 올려달라고 사정해서 40% 올려 준다고 했는데 확실치는 않아.”

친환경농사가 가격도 잘 받고 안정적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농민들의 기대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고 있다. 가격변동이 큰 채소농사에서 계약된 가격은 안정성은 있지만 고생한 만큼의 소득을 올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적지 않은 농민들이 갈등을 하고 있다고 한다. “친환경 농사 이제 그만 할까해.” 그가 깊은 고민을 털어 놓았다.

제주의 여성농민들은 농사와 해녀 일을 동시에 해낸다. 부인 김명순씨도 마찬가지다.
“난 철이 되면 물질을 해. 소라도 잡고, 성게도 잡는데 소라는 깊은 곳에 있어. 깊은 곳에 들어가니까 몸에 이상이 왔어. 목에서 피가 나고…. 서울 큰 병원에서 치료도 받고 했지. 지금은 소라는 안 해, 성게만 잡아, 성게는 좀 얕은 물에 있으니까.”

영농일지에서 본 그의 꼼꼼함은 흐트러짐 없이 각이 잡혀 정리된 책상 위에서도 드러난다. 이럴 경우 보통 다툼의 원인이 될 텐데 “다 잊고 좋은 것만 보인다”는 부인의 말이 인상 깊다. 

“이 양반은 자상해서 내가 성게를 잡아오면 바다에 나와 성게를 깨서 꺼내는 일을 도와줘. 제주 남자들은 여자들 일을 안 도와주거든. 그런데 이 양반이 바다에 나와 도와주니까 다른 여자들도 누구는 바다에 나와 도와주는데 당신은 왜 안 도와 주냐, 해서 이 동네 아저씨들도 일을 거들고 있어.”

제주 여성들은 생활력이 강하다고 알려져 있다. 추운 겨울에 차가운 바다 속에 들어가 해산물을 따서 살림을 꾸린다는 것도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상대적으로 남자들은 일이 적은 편이다. 특히 바다 일을 여자들의 일로 치부하고 외면했다. 그러나 평대리에서는 백씨에 의해 그런 관습이 깨졌다고 한다.

“이 양반이 꼼꼼하고 깔끔해서 집안일도 많이 도와 줘, 매일 밭을 매는 일을 해서 무릎이 아파서 집안 청소할 때 걸레질이 힘들어. 걸레질은 이 양반이 해.”

넓은 터에 자리 잡은 10년 된 2층 집은 노부부만 살기엔 어쩐지 휑하다. 꼼꼼함이 깐깐함으로만 남았다면 하소연이 됐을 텐데, 웃음이 집안을 한껏 채운다. 집 앞 파릇한 당근 밭을 몇 년이나 더 씨를 뿌리고 수확을 할지 지금 장담하지 못하지만, 2016년 백씨의 영농일지는 2017년에도 빼곡히 채워질 것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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