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환경 농가족 기업 육성이 꿈”

홍천 산골서 영농승계 이뤄나가는 김택우씨밭 1만평에 다품종 소량 재배 … "농산물 저가로 인식하는 사회구조 깨야”

  • 입력 2016.11.27 18:47
  • 수정 2019.05.01 16:07
  • 기자명 심증식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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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홍천 산골의 자택 앞에서 인터뷰를 하며 미소짓는 김택우씨의 표정이 자연스럽다. 김씨는 아이들과 함께 친환경 농사를 통한 가족 기업을 만드는 게 꿈이라고 설명했다.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

농촌 사회는 고령화를 넘어 초고령화 사회에 접어들었다고 한다. 농촌사회를 지탱하는 농민의 연령층은 6~70대이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깊이 패인 주름은 이 시대 농민의 상징이요, 고단한 농민들의 표상이다.

그런데 강원도 홍천의 깊은 산골마을에 희망을 만들어가는 젊은 농부 김택우씨가 있다. 그의 꿈은 친환경 농사를 통해 가족 기업을 만드는 것이다. 강원도 홍천 겨울이 일찍 시작되는 이곳, 모두가 열악한 환경을 피해 떠나는 세태에 김씨는 오히려 친환경 농사의 최적지라며 훗날 아이들도 함께 할 수 있는 농장을 꿈꾸고 있다.

지속가능한 농업이란 생태순환의 농사 뿐 아니라 영농이 승계되는 것이 필수다. 그런 면에서 김씨의 꿈은 신선하고 위대하다. 그는 올해 나이 46세에 아이들이 넷이다. 부모님과 아래윗집에 살면서 친환경 농사를 짓고 있다.

“관행농사를 지을 때였어요. 고추를 심었는데 그해 여름에 비가 계속 왔어요. 고추가 하나둘씩 죽어 가더나 나중에는 전부 죽었어요. 헛농사를 지은 것이죠. 그런데 제가 처음 고향에 들어와서 산에 다니며 산삼도 캐고 버섯도 따고 하면 삼씨를 여기저기 뿌려 놓았는데, 우연히 자작나무 숲에 심은 삼이 잘 큰 거예요. 그 삼을 캐서 그해 생활을 했어요. 한 2,500만원 정도 했으니까요.”

김씨는 사회생활을 창원에서 시작했다. 직장도 다니고 막일도 하다가 34살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아버지 농사를 도우며 동네 친구와 같이 산을 다녔다. 친구에게 산삼과 산나물을 캐고 버섯 따는 것도 배우며 산에 다니기 시작했다. 앞에도 뒤에도 옆에도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에서 살아온 그에게 산에 다니는 일은 아주 익숙한 일이었다.

2년 동안 심마니 노릇을 하며 아버지 농사일을 도왔다. 그런데 관행농은 몸에 맞지 않았다. 농사지어도 돈도 되지 않고 특히 농약을 치고 하는 것이 영 안 맞았다. 그러던 중 친환경 농사를 짓는 이웃의 형님 소개로 친환경 농사를 시작했다.

“부모님은 친환경 농사를 마땅치 않아 하셨어요. 처음에는 외따로 떨어진 밭 500평에 오이를 심었어요. 아버지는 걱정을 많이 하셨죠. 약도 안하고 그러니까요.” 평생 농사를 지어 오신 아버지의 눈에는 친환경 농사를 짓는다고 농약도 하지 않고 풀이 무성해지는 밭은 걱정꺼리였다. 제초제 한통이면 밭이 깨끗해지는데 풀을 뽑고 있으니….

“이렇게 시작한 친환경 농사가 나한테 맞는 농사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친환경 농사를 지으면 내 건강도 좋아지고 소비자도 건강해지고 나아가 세상이 건강해지는 거잖아요”.

김씨는 창원에 있을 때도 사회적인 관심이 있었다. 참여연대 활동도 하고 한살림 행사도 참여했다. 적극적 주도적으로 사회활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나름 사회적 책임감에 따른 채무의식이 있었다. 그것이 고향에 와서 친환경 농사로 천착하게 된 밑바탕이 됐다.

“첫해 농사가 잘 되었어요. 그래서 조금씩 늘려 나갔지요. 아버지도 농사가 되는 것을 보시며 이해해 주셔서 농사면적을 늘려갈 수가 있었어요. 품목도 늘려 나가서 5년이 지난 지금은 1만평의 밭농사를 짓고 있어요.” 밭 1만평에 재배하는 작목수는 15가지가 넘는다. 계절별로 다양한 작물을 재배해서 한살림에 공급하고 있다. 봄에는 달래 냉이, 브로콜리 그리고 곰치, 시금치, 여름에는 오이, 토마토, 방울토마토, 파프리카, 이어서 양배추와 오이가 끝나면 울타리콩, 가을에는 수수, 들깨, 쥐눈이콩 등 잡곡을 수확한다. 가능하면 계속 수확을 할 수 있게 해서 수입을 일정하게 유지되도록 노력한다. 그러다보니 바쁠 때는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해서 일을 한다.

유치원에 다니는 막내를 데리고 귀가한 김택우씨가 일 년 영농일지 등을 설명하고 있다.

“친환경 농사 후발 주자이다 보니 한 품목을 대량으로 공급할 수가 없어요. 오래 하신 분들은 대량공급하시는 분들이 더러 있는데, 소비자와 계약을 해서 공급을 해야 하니까 계절별로 품목을 맞춰서 생산하고 있지요. 여긴 한 여름 농사가 중심인데, 그럼 노동력이 집중돼 힘드니까 봄과 늦가을에도 분산해서 농사를 지으려고 해요. 봄에 달래를 수확하고, 늦가을에는 잡곡을 수확하게 하는 거죠, 그러면 수입도 꾸준해지니까요.”

친환경으로 다양한 품목을 재배하는 탓에 농사짓는 어려움도 상당하지만 오히려 열악한 산촌 환경이 농사에 더 도움이 되고 있다고 한다. 친환경 농산물에 대한 소비자의 이해 또한 큰 힘이다.

“골짜기이다 보니까 해충도 많지 않은 거 같아요. 해충이 달려들면 다 뜯어 먹을 거 같아도 그렇지 않아요. 어느 정도 먹고는 해충이 없어져요. 그래서 농사가 되는 거죠. 그리고 소비자들도 품질이 관행보다 떨어져도 다 인정을 해주니까요. 관행 농사는 농사지으면 팔 걱정을 해야 하잖아요. 올해처럼 시세가 좋으면 몰라도…. 그런데 친환경 농사는 그런 걱정하지 않으니까요. 어느 정도 농사만 지으면 전부 가져가니까 안정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어서 좋아요.”

한편 부모님과 아래윗집에 살고 있으니 부모님의 그늘은 항상 두텁다. 아이들을 돌봐주고 농사일에도 큰 힘이 되어 주신다. 뿐만 아니라 양식을 대주시고 있다.

“우선 애들을 봐주시니까 애들 신경 덜 써도 되죠. 그래서 애들 넷씩 낳아서 키울 수 있죠. 자잘한 일들은 전부 부모님께서 해주시니까 큰 도움이 되지요. 아버지는 지금도 당신 농사를 따로 짓고 계셔요. 아버지가 절대 포기 하지 않는 농사가 있어요. 쌀, 고추, 배추, 무 농사는 절대 놓지 않으세요. 지금도 일상의 양식을 80이 넘은 아버지께서 책임지고 계시고 있지요.” 역시 오래 농사를 짓고 살아오신 분들은 내가 먹을 양식은 내손으로 해야 한다는 남다른 책임감을 넘어 사명감이 있다. 밥과 김치는 우리에게 생명이기 때문일 거다.

이런 어른들의 사명감이 농업을 유지 지탱해온 힘이다. 그런데 그렇게 알뜰살뜰 가꾸고 일구어 민족의 먹거리를 생산해 왔지만 이제는 농업이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애써지은 농산물은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온갖 정성과 노력으로 농사를 짓는데 농산물이 저가로 인식되는 사회구조이니, 빨리 사회구조가 깨져야 해요. 밭을 갈아야 농사가 잘되듯, 사회도 변화가 있어야 되지 않겠다 싶어요. 그래서 농민회 활동도 하는데 한사람이 한 번에 바꿀 수 없으니까 여럿이 조금씩이라도 바꿔 나가려고 힘을 보태고 있어요.”

그러면서 국가가 농민들이 농사짓는 것을 한살림처럼 계약을 해서 안정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해 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 농민회에서 주장하는 기초농산물 국가수매제가 시행돼 마음 놓고 농사를 짓게 해야 농업에 희망이 생기지 않겠냐는 이야기다. 사실, 우리 농촌은 그와 같은 젊은 농민이 꿈을 키우며 살아가기에는 너무 척박하다.

“논농사가 안 되니까 논에 하우스 짓고 하우스 안 되니까 과수로 이동하고, 블루베리니 뭐니 하며 해외 농산물 들여와서 재배하고, 계속 새로운 것을 찾다 보니 투자의 연속이죠. 그러니 농민들은 빚더미에 앉게 되는 거 아닌가 싶어요. 시내 사람들은 농민들한테 보조가 많다고 하는데 하우스 짓는데 50% 보조 해줘도 농사지어서 남아야 도움이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아요. 결국 하우스 업자들만 돈 벌고, 농민들은 빚만 쌓이는 거죠. 농사지어서 살 수 있게 해야 하는데…” 당연한 이야기다. 아무리 많은 보조와 지원이 있으면 뭐하겠나. 농사지어 살아갈 수 있어야 의미가 있다.

그럼에도 김씨는 고향에서 꿈과 희망을 만들어가고 있다

“큰애가 딸인데 여주농고에 갔어요. 집에서 농사를 지으니까 자연스럽게 농업에 관심을 갖고 농고를 가게 된 거 같아요. 기숙사에 있어서 1학년 때에는 1달에 한 번씩 집에 오고 2학년이 된 지금은 한 달에 두 번씩 집에 오는데 올 때마다 농사일을 도와요. 지난주에 와서는 돼지감자를 캐고 갔어요. 제가 농장을 잘 키워서 농가족 기업으로 육성하고 싶어요. 친환경 농사 규모도 좀 더 키우고, 가공 쪽 사업도 하고, 또한 친환경농업을 통해 해외교류도 하고 연관된 여러 가지 일들을 아이들이 했으면 좋겠어요. 집주위에 울타리 삼아서 개복숭아도 심고 돌배나무도 심어 놓았어요. 어머니가 꽃을 좋아하셔서 꽃도 많이 심어 놓았는데 봄이 되어 꽃이 피면 풍경이 너무 좋아요. 개복숭아와 돌배는 수확을 하면 즙을 내 보려고 해요. 차차 농산물 가공도 준비하려고 해요.”

인터뷰는 서석면 소재지의 찻집에서 진행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유치원에 다니는 막내가 끝날 시간이 되어 데리고 오라는 전화였다. 인터뷰를 마치고 유치원으로 갔다. 반갑게 아빠의 손을 잡고 나온 아이는 기자를 보고는 수줍어 아빠 다리 뒤로 숨는다.

김씨의 집은 홍천군 서석면 청량리에 있다. 서석면은 홍천읍에서 차로 30분이나 걸릴 정도로 읍내에서도 꽤 떨어져 독립적 생활권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면소재지가 다소 번화한 편이다. 여기서 또 10여분을 더 가야 그의 터전이 나온다.

청량리 마을에서 골짜기를 따라 한참 올라가면 도랑 건너 산 밑에 집 두 채가 나란히 있다. 부모님이 사시는 집은 오래된 시골집이다. 그리고 그 옆에 새로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집이 그가 사는 집이다. 도랑과 마당을 사이에 두고 비닐하우스가 여러 채 있다. 집으로 들어가는 도랑 건너 위쪽에 있는 두 동의 비닐하우스에는 달래가 심어져, 봄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 농촌은 누구나 기피하는 곳이고 농업은 쇠락하는 산업의 표본이 된지 오래이다. 영농승계는 규모화 된 축산업을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사실 그가 사는 곳은 오지나 다름없다. 깊은 골짜기의 외딴집, 농사규모도 아주 크다고 할 수 없고 아직 소득도 만족스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원도 서석면 청량리 골짜기에서 꿈과 희망을 만들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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