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 화전민 ④] 화전, 그 빈궁한 불놀이

  • 입력 2016.11.19 10:24
  • 수정 2016.11.19 10:26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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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강원도 홍천군 내면 자운리 마을. 해발 8백 미터가 넘는 이 오대산 자락의 비탈 언덕에서 화전 개간이 시작됐다. 1965년 여름이었다.

홍천군의 각 면에서 선발된 여든한 명의 이 화전 개척단원들은, 도착한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밭으로 개간할 구역을 조별로 할당 받았다.

“배당받은 산자락을 쳐다보니 앞이 깜깜하더라고요. 아름드리나무들이 사방에 들어찬 생짜배기 야산비탈이었어요. 도대체 거기다 뭔 놈의 밭을 만든다는 것인지…”

당시 북방면에서 뽑혀갔던 이정식 노인의 회고다. 그러나 별 수 없었다. 아무리 봐도 ‘씨를 뿌려서 뭘 가꿔 먹기엔 글러먹은’ 야산이었지만, 그러나 개척단은 톱과 낫과 도끼를 들고 비탈을 올랐다. 큰 나무는 톱으로 벤 다음 토막 내서 아래로 굴리고, 작은 나무는 도끼로 찍어 넘기고, 풋나무들은 낫으로 쳐냈다. 나무를 실어내기 위하여 찻길을 만들었다. 중장비가 없던 시절이었으므로 순전히 곡괭이 따위를 가지고 그 일을 했다. 일과가 끝나고 숙소로 배정받은 방으로 돌아온 그들은 수제비로 배를 채운 뒤 모두 녹초가 되었다.

그 해 11월, 10여 대의 트럭이 줄을 지어 그 산간마을에 들이닥쳤다. 그 해 농사를 마무리하고 들어온 화전 개척단의 나머지 가족이었다. 화전개간에 동원된 남자들이 대개 이삼십 대였으므로 부인과 한두 명의 자녀가 딸려 있었다. 문제는 거주 공간이었다. 방 한 칸에 세 명의 남자가 기거해왔는데, 도토리껍데기만한 그 단칸방에서 세 명의 가족이 뭉개고 살아야 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당국에서 지어주겠다는 집은 이제 겨우 터를 닦고 있는 형편이었다.

“안 되겠어. 비상한 방법을 써야지. 우선 토막집이라도 짓자고.”

나무를 베어다 토막 낸 다음, 그 토막을 가지고 마치 성냥개비 쌓기 놀이를 하던 것처럼 이러 저리 포개 걸쳐서 서너 식구가 거처할 공간을 만들었다. 바닥엔 거적 떼기를 깔고 지붕은 억새를 베어다 덮었다. 비가 오면 여기저기 놓아둔 세숫대야에서 쌍 장구 소리가 울렸다.

“자, 이제 벌채작업을 마쳤으니 오늘 밤에는 불을 놓을 것이오. 불길이 번지면 안 되니까 화전 가장자리에 골 파는 작업을 시작합니다!”

모두들 삽과 곡괭이를 챙겨들고 화전 가장자리에 골 파기 작업을 시작했다. 대개 3미터 이상의 간격으로 골을 내어야 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바람이 불지 않은 때를 잡다보면 그렇게 오밤중에 불을 지르는 경우가 많았다. 한두 군데가 아니었으므로 여러 뙈기의 화전에서 동시다발로 불길이 솟아 번졌다. 불길이 온 동네를 환하게 밝혔다. 개척단을 따라 들어온 가족들이 모두 밖으로 나가서 불구경을 했다.

“이런 구경은 태어나서 처음이구먼. 아이고, 우리네 앞날도 저렇게…”

명개리에서 남편을 따라 들어온 월천댁이 환성을 질렀다. 화전민촌 주민들은 자신들의 앞날이 그 날 밤의 불길처럼 그렇게 번성하기를 바랐다.

여자들도 나가서 땅을 팠다. 약속대로 1인당 4천5백 평이 배당되었지만 밭 가운데 바위가 있거나 나무 그루터기가 박혀 있기도 해서 실제 농사지을 땅은 3천여 평에 불과했다. 물론 군청당국에서 거처할 집도 제공을 했으나, 사방에 기둥만 박아놓고 나머지는 알아서 지어서 살라 했다. 개척단원들은 몇 명씩 품앗이를 해서 얼기설기 지붕을 잇고 벽을 세웠다.

이정식 네는 첫해에 화전에다 감자농사를 지었다. 불탄 재가 밑거름이 되어서 그럭저럭 수확이 괜찮았다. 농사를 짓기 시작하자 밀가루 배급이 끊겼다. 다음해에는 옥수수를 파종했다. 그러나 지력이 떨어져서 소출이 형편없었다. 3년쯤이 되자 하나 둘 마을을 떠나기 시작하더니 5년째가 되자 60여세대가 살길을 찾아 떠나버렸다.

“생각하면 한숨만 나오지. 내 청춘을 바쳤는데….”

끝까지 남아서 칠순에 이르도록 화전민촌을 지켜온 이정식 노인의 한숨이 길디길다. 1968년, 울진 삼척지구에 무장공비가 출현하는 소동이 있고난 뒤, 공비들과 소통할 우려가 있다 하여 유랑화전 행위도 일절 금지됐다. 이후 화전이라는 그 원시농법은 헤실바실 전설이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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