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 엿 ③] 엿장수 맘대로

  • 입력 2016.10.21 16:39
  • 수정 2016.10.23 16:38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상락 소설가

6.25 전쟁 발발 직후 남녘으로의 피란길에 나섰던 강봉석네 가족은, 충청도 충주의 변두리로 흘러와서 피란 보따리를 풀었다. 생계 방편을 모색해 봤으나 답이 떠오르지 않더라, 했다. 강봉석을 비롯하여 자식만 해도 여섯이나 되었으니, 가장인 강만형으로서는 식솔들의 생계 방편이 막막하기만 했다.

일단 충주역의 수화물 하역인부로 취직을 해서 얼마간 일을 했으나 거기서 받은 노임으로는 열 명이나 되는 식솔이 연명하기엔 턱도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까짓것, 다시 엿 장사를 하자!”

당시만 해도 식품위생법 따위가 없었기 때문에 엿은 누구나 만들어 팔면 되었다.

가마솥 세 개를 구해다 걸었다. 늘 해온 일이라 특별히 어렵지는 않았으나 문제는 땔감이었다. 세 개의 가마솥에 밤을 새워 불을 때야 하는데, 나무를 해오자니 30리나 걸어가야 산에 이를 수 있었다. 어느 일요일 새벽, 강만형은 중학생이던 아들 강봉석을 깨워서 곡식 포대자루를 들리고선, 한때 자신이 하역인부로 일했던 충주역으로 갔다. 당시는 기차가 ‘칙칙폭폭’의 증기기관차 시절이었기 때문에 선로 주변에 가면 연료를 공급하는 과정에서 흘린 탄가루가 얼마쯤 쌓여있었다. 고놈을 삽으로 긁어 자루에 담아와 연료로 썼던 것이다. 물론 그나마도, 강만형이 한 때 충주역에서 하역인부를 했기에 역내 출입이 가능했다.

“사실은 흘린 것만 수거해온 것이 아니라 가끔 석탄더미에서 몰래 조금 훔쳐오기도 했어요.”

그런 것까지야 고백할 필요가 없었는데도 순진한 강봉석 사장은, 취재차 찾아간 나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새벽에 아버지와 함께 역에 가서 비록 석탄 부스러기나마 나라 재산을 ‘도둑질’했으므로 이실직고를 하고 싶다 했다. 그땐 먹고 사는 일이 지상과제였으니 괜찮다고, 그건 도둑질도 아니라고, 다들 그렇게 살았노라고…내 맘대로 용서를 해줘버렸다.

아침, 가마솥을 열어보니 엿이 걸쭉하게 잘 고아졌다. 때를 맞춰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양푼 하나씩을 챙겨들고 대문 안으로 들어선다.

“엿 받으러 왔습니다!”

엿을 받으러 온 이 사내들이 바로, 우리가 동네에서 만났던 엿장수들이다. 그렇다면 그 엿장수 사내들이 엿목판에 가지고 다니던 그 하얀 색깔의 엿은 어떤 가공과정을 거치는 것인지, 그들을 따라가 보자.

사내들이 강봉석네 집에서 밤새 곤, 붉은 색깔의 갱엿을 제가끔 양푼에 담아들고 들어간 곳은, 사방에 고물더미가 어지럽게 쌓여 있는 퀴퀴한 고물상이다. 고물 야적장 한 쪽에 판자를 얼기설기 잇대 만든 허름하기 짝이 없는 가건물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그곳이 바로 우리가 유년시절에 골목에서 만났던, 엿장수이자 혹은 고물수집 일꾼이기도 한, 그 꾀죄죄한 사내들의 합숙소다. 아니, 그 곳은 붉은 갱엿이 한바탕 탈색하고 변신을 하는 가공공장이기도 하다.

사내들의 ‘엿치기’ 작업이 시작된다. 합숙소의 판자벽에는 군데군데 빨래방망이만한 나무 말뚝이 벽면에 수직으로 박혀 있다. 사내들은 붉은 엿 반죽 덩어리를 그 말뚝에다 걸치고서 아래로 잡아당긴다. 반죽이 늘어나면 말뚝에서 반죽의 한 쪽 끝을 벗겨서 겹친 다음 다시 걸치고 또 잡아당긴다. 중국음식점에서 국수 가락을 뽑아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엿 반죽이 손에 들러붙지 않아야 하므로 세숫대야에 물을 떠다놓고 두 손을 중간 중간 적셔야 한다. 겨울철이 되어 물이 얼면 그냥 두 손에다 퉤퉤 침을 바르고선 그 손으로 엿 반죽을 잡아당긴다. 어느 사이 붉은 갱엿의 색깔이 하얗게 변하고 엿가락도 점점 가늘어진다. 가락을 겹쳐 잡아당기다 보면 공기가 들어가서 가운데에 송송 구멍이 뚫린다. 엿장수들의 엿치기는 고물상 합숙소에서 이뤄졌지만 사먹는 사람들의 엿치기는 엿가락을 부러뜨려서 어느 엿가락의 구멍이 더 큰지를 겨루는 내기다. 엿장수가 가지고 다니던 엿에는 가늘게 뽑은 가래엿 말고도 덩이째 목판에 가지고 다니면서 끌을 대고 가위 손잡이로 떨어주던 ‘판엿’이 있었는데, 판엿은 소다를 넣어서 부풀게 만들었다. 그 시절 우리는 벙거지모자의 그 사내들이 지저분한 판자벽에서 더러는 침을 발라서 뽑은 그 엿가락을 맛나게 먹었던 것이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