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 엿 ②] 붉은 엿, 흰 엿

  • 입력 2016.10.14 16:32
  • 수정 2016.10.16 17:09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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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증조부께서 했던 이 일을 조부님이 물려받았고, 이어서 큰아버지와 아버지가 대물림을 했으며, 지금 나도 하고 있으니 4대째가 됩니다. 장차 아들에게 물려줄 생각입니다. 우리 집안의 가업이 된 셈이죠.”

 2001년 3월, 충청북도 충주시 성래동의 공장에서 만난 강봉석 사장(당시 60세)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가 자랑하는 ‘가업’은 다름 아닌 ‘엿 장사’다. 아니, 하고 많은 일 중에서 하필 엿 장사를 가업으로 삼아 4대째 해오고 있다고? 허름한 벙거지 모자를 쓰고 고물 리어카에 엿판을 싣고서 행상을 하는…바로 그 엿 장사를?

 하지만 엿 장사를 우습게보면 안 된다. 그는 현대식으로 깔끔하게 지은, 어엿한 엿 생산 공장의 사장이다.

 내가 15년 전에 취재차 찾아가서 만났던 그가, 아직도 그 곳에서 그 일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보려고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당시만 해도 소박한 규모였던 그의 엿 공장은 이제는 엿 말고도 다양한 종류의 조청을 생산·공급하는, 어엿한 중견 식품제조업체로 성장해 있다. 또한 그 사이에 그는 엿과 조청 제조분야의 명인(농림수산식품부장관)으로 지정되었다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출세한 엿장수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엿 장사, 혹은 엿장수에 얽힌 지난 시절의 이러 저런 사연들을 강봉석 씨만큼 실감나게 얘기해 줄 사람이 따로 없을 터이다.

 옛 시절, 어지간히 먹고 살만한 집안에서는, 가을 추수가 끝나면 찹쌀이나 멥쌀로 엿을 고아 두었다가, 설날이면 아이들에게 세뱃돈 대신 엿 한 조각씩을 선물로 내놓았다. 쌀을 물에 불려서 찐 다음에 엿기름가루를 넣고 가열하였다가, 체로 걸러내고 다시 열을 가하면 물엿이 된다. 이 물엿이 바로 설날에 떡을 찍어먹던 조청이다. 조청을 더 농축하면 붉은 색깔의 덩어리 엿이 되는데 이것을 지방에 따라 강엿, 갱엿, 혹은 개엿이라 불렀다.

 그러니까 모든 엿의 본디 모습은 붉은 색의 덩어리다. 그것을 짜장면 집에서 국수 뽑듯이 반복해서 잡아 늘이는 작업을 하면 공기가 들어가서 흰색의 엿가락으로 변하는 것이다.

 경기도 포천에 살았던 강봉석의 집에서는 아예 장사 목적으로 엿을 달였다. 그의 부친 강만형은 수완이 좋아서, 트럭에다 엿판 20여 개를 싣고서 황해도 해안지방을 돌면서 엿 장사를 했다. 그러니까 리어카에 엿판을 싣고 쩔겅쩔겅 가위질을 하면서 코 묻은 돈이나 고물을 받고 엿가락을 떼어주는 그런 행상이 아니라 어촌을 돌면서 엿을 아예 판으로 건네주고, 대신에 생선이나 건어물을 받아다가 내륙에서 팔아 이윤을 남기는 식으로 장사를 했던 것이다.

 어린 시절 내 고향 마을에서는 미역을 베는 날이 바로 그 갱엿을 실컷 먹을 수 있는 날이었다. 당시엔 양식기술이 도입되지 않았으므로 돌미역은 대단히 중요한 소득원이었다. 따라서 개별 채취를 엄격히 금하였다. 사리 때 어느 날을 잡아서 공동으로 채취한 다음에 호별로 똑같이 분배하였다.

 바로 이 날이 되면, 어떻게 알았는지 육지에서 엿장수들이 엿 보따리를 가지고서 현장으로 모여들었다. 우리 집 몫으로 배분받은 생미역 중에서 두어 가닥만 갖다 주면, 미역 색깔의 붉은 갱엿 한 덩어리를 받아올 수 있었다. 접시만한 엿 덩이를 갯돌로 깨서 한 조각 입에 물면, 집에 돌아올 때까지 내내 행복했다.

 

 전쟁이 터졌다. 38선 인근에 살았던 강봉석의 가족들도 피란길에 올랐다. 아버지인 강만형은 이불 보따리와 쌀 한 말을 짊어졌고, 어린 강봉석은 쌀 한 말을 고아 만든 엿 보따리에 멜빵을 달아 메었다. 의정부 근처 고개에 이르렀을 때 행렬 인근에 폭탄이 터졌다. 강봉석은 허둥대다가 그만 언덕 아래로 굴렀는데 보따리만은 놓치지 않고 악착같이 부둥켜안았다.

 강봉석의 가족이 피난 봇짐을 푼 곳은 충주시 역전동, 지금의 문화동이다. 거기서 새로운 엿 장사를 시작하였다. 피란길에 짊어졌던 그 엿 봇짐을 평생 내려놓지 못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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