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정신문 한승호 기자]
“.....”
말이 없었다. 침묵이 무거웠다. 울분, 탄식, 체념이었을까. 굳게 닫힌 입이 열렸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합니까.” 보름 후면 걷이할 나락이었다. 흔히 하는 말로 이런 풍년이 없었고 보는 이마다 “나락 참 실하네” 한마디씩 거든 논이었다.
황금물결이 이는 논으로 쇠스랑을 건 트랙터가 굉음을 울리며 진입했다. 벼 이삭은 나락보다 큰 바퀴에 속절없이 쓰러지고 짓밟혔다. 물이 덜 빠져 아직 굳지 못한 논의 진흙 사이로 나락이 파묻혔다. 시퍼런 하늘, 금빛 벼, 가을하면 떠올리는 천연의 빛깔 속에 이질적인 잿빛 진흙이 살풍경스러운 모습만큼이나 도드라졌다.
논엔 ‘쌀 대란 대책없는 박근혜는 퇴진하라’, ‘정부는 재고미 종합대책을 마련하라’, ‘쌀 수입 전면중단하고 쌀값 보장하라’ 등이 적힌 만장이 꽂혀 바람을 타고 좌우로 나부꼈다. 논을 갈아엎는 트랙터엔 ‘박근혜 퇴진’, ‘쌀값 보장’이 새겨진 현수막이 진흙 범벅이 된 채 매달려있었다.
한 필지(1,200평) 되는 논을 뒤엎는 광경을 농민들은 이렇다 할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뒷짐을 지고, 쪼그려 앉고, 이따금씩 퀭한 눈을 껌벅이며 나락을 갈아엎는, 말도 못할 살풍경에 한숨만 내뱉을 뿐이었다. 연신 꺼내 문 담배 연기가 곳곳에서 피어올랐다. 일 년 가까이 경작한 논을 30여 분만에 갈아엎은 한동웅(59, 익산시 오산면)씨는 “뭐라도 해야겠다는 절박감에 나선 행동이 오늘의 결과”라며 “쌀값 안정을 위한 대폭적인 정부수매 계획 등을 하루빨리 발표해야 한다”고 강하게 촉구했다.
쌀값 폭락 대란에 ‘이대로는 먹고 살 길이 없다’는 절체절명의 위기의식에 공감한 전북 농민들은 지난 20일과 21일 익산, 순창, 장수, 김제 등지에서 다 자란 벼를 갈아엎었다. 익산·김제 4,000여㎡, 순창 2,600여㎡, 장수 1,900여㎡에 달하는 농지가 순식간에 진흙탕이 되고 말았다. 농민들은 “조생종 벼가 3만 원대로 급락했고 이마저도 수매가 되지 않고 있는 것이 농촌의 현실”이라며 “정부의 무분별한 쌀 수입과 170여 톤에 달하는 재고미가 쌀값 폭락의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농민들은 진흙탕으로 변한 논에서 트랙터가 빠져 나오기까지 쉽사리 제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논 주위를 서성거리는 농민들 모습 사이로 김제시농업인단체연합회가 내건 현수막이 유난히도 눈에 밟혔다. 내용인즉슨 ‘쌀값 똥값! 농민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