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 우물③] 사카린·우물고사·작두샘

  • 입력 2016.06.12 09:44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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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락 소설가
오늘은 군희네 서속밭 매는 날. 뙤약볕 아래에서 한나절 내내 김을 매고 돌아온 엄니들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호미를 내던지고는 눈치 볼 남정네도 없겠다, 윗옷을 훌훌 벗어던졌다. 어느 엄니 할 것 없이 목 언저리며 가슴패기가 온통 땀띠 투성이었다. 집주인인 군희네 엄니가 우리를 보고 말했다.

“샘물 한 두레박 질러 봐라 이. 나는 타 묵을 것 갖고 나올랑께.”

군희가 들고 있던 두레박을 빼앗아 내가 하겠다고 나섰다. 그새 깊은 우물에서 두레박질하는 요령을 나름으로 익혀둔 터였다. 먼저 줄을 우물 속으로 다 내린 다음, 두레박을 뒤집은 채로 양손으로 들고 있다가 허공 한가운데에서 떨어뜨리면, 엎어진 그 상태에서 수직으로 낙하한 두레박의 아가리가 우물물의 수면에 퍽, 하고 박혔다. 두레박이 안 엎어진다고 줄을 흔들고말고 할 필요가 없었다.

엄니들이 바가지며 양은대접에 갓 길어 올린 우물물을 채워 들었다. 군희네 엄니가 접힌 종이 첩을 펴서는 작은 알갱이 서넛씩을 집어 엄니들의 대접에 빠뜨려 주었다. 엄니들은 숟가락으로, 혹은 그냥 손가락으로 휘휘 저어 녹인 다음 벌컥벌컥 들이켰다. 딱지치기를 하느라 덥고 목이 말랐으므로 우리도 허겁지겁 들이마셨다. 달고 시원하기가 머리끝이 쭈뼛해질 지경이었다. 중간에 입을 떼지 않고 연신 들이켠 탓에 꺼윽꺼윽, 하마터면 숨이 막혀 쓰러질 뻔했다. 그 요술 같은 투명 알갱이는 당도가 설탕의 5백 배나 된다는 사카린이었다. 막 길어 올린 우물물에 사카린을 타서 배가 볼록하게 들이켤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그 시절 우리가 누렸던 여름날의 축복이었다.

얼마 뒤에는 사카린 말고 ‘당원’이라는 것이 나왔고 또 한참 뒤에는 시골의 구멍가게 진열판에 미원이나 미풍처럼 비닐로 포장을 한 ‘뉴슈가’라는 고상한 이름의 가루가 나와서 우리 촌놈들의 단맛을 책임졌다.

정월 대보름이면 해마다 우물고사를 지냈다. 물을 다스리는 수신(水神)이 일 년 중 바로 이날에 강림한다 했다. 이틀 전부터 우물고사의 제주(祭主)를 맡은 집 사립에서부터 우물에 이르기까지의 길바닥에 붉은 황토를 깔아서 부정한 기운의 범접을 막았다. 공동우물 주변으로는 외로 꼰 새끼줄로 금줄을 둘러쳤다. 종석이와 나는 달밤에 몰래 바로 그 금줄 안으로 들어가 우물 뚜껑을 살짝 열어본 적이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우물물 위에 불이 둥둥 떠다녔다. 들기름을 담은 주발에 심지를 걸쳐서 불을 붙인 다음 바가지 안에 넣어 샘에 띄운 것이었다. 우리는 그 분위기가 조금은 경건하면서 또 조금은 섬뜩하게 느껴져서 그만 뛰쳐나오고 말았다.

마을에 나쁜 일이 생기면 괜히 우물고사를 맡아 지낸 제주를 원망하는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고사를 정성껏 지내지 않았거나, 혹은 제주가 사전에 부정 탈만한 행위를 했기 때문에 용왕님이 노한 것이라는 얘기였다.

우리 마을에서는 샘제[泉祭], 즉 우물고사를 지내는 날엔 동네 사람 모두가 생선 먹는 것을 금기로 하였다. 어느 해인가는 준열이 아버지가 제주가 되어 고사를 주관했는데 하필이면 그해에 동네에 돌림병이 돌고 산불이 나고 하는 바람에 그에게 원망이 쏟아졌다. 준열이 아버지는 우물고사에 너무나 정성을 기울인 나머지, 고사 상에 명태 찜을 제물로 올렸던 것인데 그것이 사단이었다. 상식이네 조부님이 큰소리로 말했다.

“용왕님을 모시는 고사상에 용왕님 백성인 맹태를 삶아서 바쳤으니 노하지 않게 생겼어!”

내가 중학에 진학하였을 무렵에 전라도 사투리로 ‘작두샘’이라는 것이 생겼다. 수동 펌프질로 지하수를 뽑아 올리는 장치였는데 마치 작두질을 하는 것 같다 하여 그렇게 불렀다. 펌프질은 주로 힘센 남성들이 맡아했다. 이때부터 여성 해방공간의 구실을 해왔던 전통촌락의 ‘공동우물’에다 더는 고사를 지낼 필요가 없어졌다. 펌프질로 지하수를 뽑아 올리는 작두샘이 생기면서, 매우 아름답고도 상징성이 깊은 순우리말 어휘 하나가 탄생하였다. ‘마중물’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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