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제3장 어떤 세월 35회

  • 입력 2015.09.11 14:23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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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서 길을 닦을 준비를 하는 동안 선택은 면 직원과 다른 동리의 젊은이 두 명과 더불어 도청소재지가 있는 ㅊ시까지 가서 시멘트를 섞고 철근을 넣는 법 따위를 배웠다. 그리고는 바로 이어서 길 공사에 들어갔다. 열흘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했던 공사는 불과 이레 만에 끝났다. 칠십 여 명의 노동력은 그렇게 엄청났다. 회칠한 듯 뽀얀 시멘트 길이 생기자 마을 사람들은 너나없이 좋아했다. 마을이 생기고 처음으로 엄청난 공동의 작업을 해냈다는 뿌듯함까지 더해져 이상하다싶을 정도로 흥분된 감정이 마을을 휘감았다. 면내에서 제일 먼저 길을 닦은 시곡마을로 다른 마을 사람들이 일부러 구경을 왔고 사람들은 새 길을 마치 제 집 앞마당이라도 되는 양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 일러스트 박홍규

그리고 시멘트가 다 말라 사람들의 통행이 시작되었을 때, 새 길에 처음으로 들어선 것은 시커먼 지프 차였다. 양 옆에 붉은 글씨로 ‘보도’라고만 쓰여 있는 그 차에서 내린 사람은 신문기자였다. 커다란 카메라를 든 사진 기자도 함께였다.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성황나무 아래 멈춘 차에 사람들이 모여들자 안경을 쓴 젊은 기자는 대뜸 선택을 찾았다.

“정주사는 오늘 출근했을 것인디.”

누군가 대답을 하기가 무섭게 양복을 입은 선택이 멀리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사실 마을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뿐 선택과 이미 약속이 잡혀 있는 기자였다. 선택이 자청한 것은 아니었고 그 동안 간간이 연락을 주고받던 서울의 권순천이 주선한 것이었다. 그는 혁명세력과의 친분으로 젊은 나이에 이미 농정국장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농촌 사업을 실무적으로 총괄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며칠 전에 그가 농협으로 전화를 걸어와서 산동면에서 배포된 시멘트로 선도적으로 사업을 한 마을을 물어왔고 선택이 자신의 마을을 추천하자, 일간 신문의 기자를 보내겠다고 이야기가 된 거였다.

“이번 기회에 정주사도 한 번 신문에 얼굴 좀 내보지. 누가 아나? 좋은 일이 생길지.”

권순천이 그렇게 말한 것도 있고 기자가 그와 친분이 있다고 해서 선택은 아예 직장에 출근을 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조그만 시골에서 중앙의 농정국장과 직접 전화 통화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선택은 막강한 위치였다. 웬일인지 그가 실제로 도움을 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어쨌든 그와의 인연은 귀중한 것이었다. 하여 집에서는 벌써 전을 부치고 닭을 잡아 점심상을 거나하게 차리는 중이었다. 면장까지 시간에 맞추어 오겠다고 한 터였다.

“안녕하십니까? 권국장님께 연락은 받으셨지요?”

젊은 기자가 명함을 꺼내 선택에게 건넸다. 조선일보의 사회부 기자였다.

“먼 길 오느라고 고생 많으셨습니다. 정선택이라고 합니다. 점심참이 다 되었으니 먼저 식사를 하시지요.”
“생각했던 거보다 마을이 조그만 합니다. 몇 호나 살고 있지요?”

마을의 노인들이 죽 둘러서 있는데도 담배를 빼어서 불을 붙이고는 손가락을 까닥여서 카메라를 든 기자를 불렀다.

“칠십 여 호가 삽니다. 주민은 이백 팔십여 명이구요.”

“그렇구만요. 이번에 새로 깔았다는 길이 이거겠지요? 야, 필름 아끼지 말고 여러 장 찍어. 동네 사진도 찍고 여기 노인분들하고 애들 사진도 찍고.”

아무리 기자지만 농민들이 울력을 해서 길을 깔았다면 고생했다는 말 한 마디 거들어도 좋으련만 어딘지 거만함이 가득한 자였다. 선택은 은근히 속이 뒤틀렸지만 내색을 할 순 없었다. 신문 기자라면 실로 막강한 자리인 데다 더욱이 조선일보라면 몇 손가락 안에 드는 큰 신문사였다. 면내에서 제일 많이 보는 신문은 창간한 지 오래지 않은 한국일보였다. 면수도 제일 많고 재미있는 읽을거리가 많다고들 했다. 선택도 한국일보를 즐겨보는 편이었다.

“저희 집이 여기서 좀 더 올라가야 하는데, 차를 두고 걸어가실까요? 아님 차를 타고?”

“멀지 않으면 좀 걷지요. 오랜만에 시골길도 걸어봐야죠. 앞장서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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