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의 배신 … 양돈 농가 “백신 100% 불신한다”

투명한 구제역 방역 정책·맞춤형 백신 개발 호소

  • 입력 2015.07.03 13:36
  • 수정 2015.07.03 13:41
  • 기자명 박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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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제역 살처분의 아픈 경험을 간직한 양돈농가에게 백신은 유일한 ‘출구’였다. 그러나 지난해 구제역 재발 후 ‘물백신’ 논란이 불거지자 농민들은 백신을 불신하기 시작했다. 지난달 29일 한 농민이 현재 사용중인 구제역 백신을 들어보이고 있다. 한승호 기자

[한국농정신문 박선민 기자]

구제역이 힘을 잃는 여름, 양돈 농가들은 올 겨울 재발할지 모르는 구제역에 대비하기 위해 백신 접종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백신을 바라보는 농가들의 표정은 어둡다. 지난해 겨울에 찾아온 구제역을 막아내기에 백신은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양돈 산업으론 1, 2위를 다투는 경기도와 충청남도 지역의 양돈 농가들은 지난 겨울 이른바 ‘물백신’을 겪은 이후 백신에 대한 불신이 생겼다. 농가들은 한 목소리로 백신이 구제역 방어를 하지 못하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꼬집었다.

충남 당진시에서 돼지 300두를 기르는 이희조(60)씨도 지난 겨울을 기점으로 백신에 대한 인식이 변했다.

이씨는 “2011년엔 이동제한에 걸려 손실을 많이 봤다”며 “그래도 그땐 백신에 대한 믿음이 컸고 접종하면 안심이 됐는데 이젠 백신을 놔도 구제역에 걸리니 백신을 믿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경기 안성시에서 1,000두를 기르는 최동선(60)씨도 “백신이 공급되면 뭐하냐. 남아있는 건 다 물백신인데. 효능도 없는 걸 안 쓴다고 단속하는 건 순 엉터리지”라며 백신에 대한 불만을 강하게 표출했다.

농민들은 2011년부터 O1-manisa 백신을 써왔지만 효능에 대해서는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정부가 농가에게 방역·소독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책임을 물어도 농민들은 우리 탓이려니 했다. 구제역 백신 접종이 어려워도, 혼자 몇 천 마리를 하기에 역부족이어도 어쨌든 재산인 돼지를 지키기 위해 백신 접종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백신은 농민들을 배신했다. 더군다나 정부가 O1-manisa 백신이 물백신이란 걸 알면서도 숨겼다는 사실이 탄로 나면서 정부의 폐쇄적인 방역대책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손종서 한돈협회 경기도협회장은 “우리는 정부의 말만 믿고 백신이 효과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검역본부는 백신 매칭률이 0.14라는 사실을 알고도 말하지 않았다”며 “정부가 정확히 농민들에게 알려줬다면 병이 안 났을 것”이라며 씁쓸해했다.

손종서 회장은 일부 농가들은 물백신 반환요청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아직 O1-manisa가 많이 남은 농가들은 백신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구제역 파동 당시 백신이 부족하다보니 필요량 이상으로 사놓은 농가들이 있기 때문”이라며 “하지만 O1-manisa 백신은 재고량이 파악이 안 된 상태기 때문에 백신의 소진 여부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물백신 논란 이후 공급되는 새 백신 수급도 원활하지 않았다. 경기 안성, 용인, 이천 등 지역 농가들에 따르면 실질적으로 농가에 보급된 건 6월부터다. 맞춤형 백신의 필요성이 대두됐지만, 정부는 구제역이 터지고 시간이 한참 지난 올해 2월에서야 신형백신 공급을 발표했다. 지난해 터진 구제역과 보다 가까운 O-3039 균주를 포함한 백신이다.

이는 농가들이 6월 이전까지 효과 없는 O1-manisa를 계속 사용했단 말이 된다. 백신을 접종하지 않을 경우 과태료를 물기 때문에 효과가 없는 백신이라도 쓸 수밖에 없다.

경기 용인시에서 2,400두를 기르는 김용모(59)씨 또한 물백신 사태는 답답하지만 구제역 예방엔 다른 방도가 없어 백신을 계속 접종하고 있는 상황이다.

김씨는 “백신을 2차 접종하면 구입비용도 배로 들고 출하시기도 늦어지고 백신 놓는 자리에 화농 생기면 돼지를 팔수도 없고 여러 가지 금전적 손해가 막심하다”며 “그래도 백신을 놔야 되니깐 효능이 없다는 걸 알면서 그냥 꾸준히 하는거다. 차라리 물백신에 대한 피해보상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고 심정을 밝혔다.

농가들은 여전히 구제역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외부인의 출입을 극도로 꺼리고 농장 입구에는 출입제한 표지문이 그대로 있고, 방역 소독기도 입구에 설치돼 있어 진입로는 엄숙하기까지 하다. 2011년의 살처분의 끔찍한 경험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아서다.

구제역을 피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발생한 구제역에 맞는 맞춤형 백신을 원하는 목소리가 높다. 안성의 최동선씨는 “구제역 바이러스는 자꾸 변형도 일으키고 타입도 바뀐다고 한다. 하나의 백신으로 어떻게 대응하겠나. 이에 대한 맞춤형 백신이 필요하다”며 정부의 노력을 촉구했다.

당진의 이희조씨도 “유통과정에서 백신이 변질될 우려가 있다고 하는데 철저히 점검하고, 적어도 50% 정도 항체율이 나오는 백신을 공급해달라”고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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