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고구마②/ 고구마는 「뿌리식물」이다

  • 입력 2015.05.24 09:17
  • 수정 2015.05.24 09:18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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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락 소설가
요즘은 흰색 고구마를 찾아보기 어렵지만, 내가 우리 마을에서 자주색 나는 고구마를 처음 본 것은 아마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이었던 것 같다. 처음엔 하도 신기해서 “뭔 놈의 감재가 요로케 뿔그죽죽하다냐, 그랬다.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대체로 우리 고장의 고구마는 흰색 일색이었다. 색깔로 나누자면 그렇다는 얘기고, 고구마의 맛을 기준 삼아서 우리끼리 나눠 부르는 이름은 또 따로 있었다. 삶은 고구마를 반으로 쪼갰을 때 마치 밤처럼 속이 부스러지고 고소한 맛이 나는 놈을 포글포글하다고 하여 ‘포글감자’라고 했다.

또 한 가지는 우리가 ‘물감자’라고 부르던 물고구마다. 다른 설명 필요 없이 요놈은 엿처럼 단 맛이 난다. 종자도 종자지만 토질과도 관계가 있어서 모래흙에 파종한 고구마는 ‘포글감자’, 습한 땅에서 거둔 고구마는 대개 ‘물감자’의 맛을 지녔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구마는 겨우내 먹어야 할 주식이었으므로, 온돌방의 한 귀퉁이에 수숫대 따위를 엮어서 ‘두대’를 만들고 거기에 거의 천장이 닿을 듯한 높이로 고구마를 채웠는데, 늦가을에 포글감자였던 녀석들도 봄철이 되면 어느 사이 물감자가 돼 있었다.

봄이 되어서 날씨가 풀릴 무렵이면 얼마 남지 않은 고구마들은 그 두대 안에서 움을 틔운다. 그놈들이 ‘씨감자’다. 아버지는 두대를 해체하고 씨고구마를 내어다 남새밭에 심었다. 이 종자 고구마를 ‘무광’이라 하고, 파종하는 그 행위를 ‘무광을 심는다’라고 하였다. 속담에 “맛없기가 무광 맛이다”라는 말이 있었다. 무수히 순을 틔워서 여러 갈래의 덩굴을 키워내느라 양분을 모두 소진한 그 씨고구마는 흡사 육남매를 생산한 엄니의 쪼글쪼글한 뱃가죽, 그것이었다. 허기를 채우려고 고놈을 깎아 먹어 보기도 하고 삶아 먹어 보기도 했지만 거기 무슨 맛이 더 남아 있었겠는가?

늦봄, 혹은 초여름 어느 날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이런 날이 고구마 심기에 딱이다. 아버지는 이미 보리를 거두고난 밭에서 쟁기질이 한창이다. 엄니가 온 식구 총동원령을 내린다. 예닐곱 살 어린 녀석까지 나서서 남새밭에서 잘라낸 고구마 덩굴을 이고 지고 안고 밭으로 내달린다. 끝부분의 움은 끊어내고, 사오십 센티미터쯤 되는 덩굴을 두둑에 일단 늘어놓는다. 오른손 엄지로는 두둑 속으로 덩굴을 밀어 넣어 묻고, 왼손으로는 두둑의 흙을 쓸어 올려서 눌러 다져나가는 작업이다.

비를 맞고 잘 살아주기만 한다면 오래지 않아 땅위로는 무성한 덩굴을 뻗어나갈 것이고 땅속으로는 고구마가 주렁주렁 몸집을 키워 갈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아내가 인천에서 학원을 운영하였고 나는 그 학원의 한 귀퉁이를 얻어 내 작업실로 쓰고 있었다. 늦봄의 어느 주말, 아내가 어디선가 고구마덩굴을 한 아름 가져왔다. 그 해에 처음으로 분양받은 주말농장에 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날따라 아내도 나도 친지의 결혼식에 가야했다. 수학선생이 나섰다.

“걱정 마십시오. 제가 아이들 몇 명 데리고 가서 확실히 파종하고 오겠습니다. 마침 아래층 미술학원의 피카소 선생도 같이 가주겠다고 하니까….”

총각인 수학선생이 ‘여자 피카소’라는 별명을 가진 미술학원의 처녀선생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사실은 아이들 사이에도 이미 소문이 나 있는 터였다.

저녁, 농장에서 돌아온 수학선생이 양양하게 말했다.

“잘 심었습니다. 두고 보십시오. 이따만한 고구마가 주렁주렁 열릴 테니까요.”

그날 저녁 그 두 선생에게 무리를 해서 소갈비를 배불리 대접했는데…, 일주일 후 농장을 둘러보러 나간 우리 부부는 경악을 금치 못 하였다. 고구마 덩굴의 한쪽 끝만을 땅에다 묻고, 그 나머지를 공중으로 올려 세운 다음, 어디서 구했는지 고추 지지대를 땅에 박고선 거기에다 나일론 줄로 덩굴을 묶어 놓았다. 한 마디로, 눕혀서 땅속에 묻어야 할 덩굴을 공중에 매달아 놓았던 것이다. 우리는 혹 땅주인이 볼세라, 말라비틀어진 고구마 덩굴을 거두어 치우면서 투덜거렸다.

“에이, 밀레 같은 리얼리스트가 따라갔어야 하는데 피카소가 따라갔으니, 고구마가 허공에 주렁주렁 매달리는 상상을 했겠지.”

“수학 선생은 또 어떻고. 고구마가 뿌리식물이라는 아주 기초적인 ‘근(根)의 공식’도 모르면서 아이들에게 뭔 놈의 수학을 가르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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