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폭력

  • 입력 2014.08.10 18:16
  • 기자명 한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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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으로 상징되는 것은 완장이다. 혁명 빨치산들의 붉은완장은 완강한 권력을 상징했다. 해방공간이 그랬고 한국전쟁당시 인공치하가 그랬다. 그 앞에선 인간의 존엄이나 자주성은 인정되지 않았다. 어린 날 학교에서도 노란완장을 주었다. 교문에 버티고 서서 딱지를 뺏거나 구슬을 압수하기도 했다. 완장의 권력은 허용된 폭력에 다름 아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의 완장폭력은 무시무시하기 까지 했다.

지난시절 검은 띠가 두 줄 그어진 노란 바탕에 ‘지도’라고 쓰인 완장이 설친 때가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쿠테타로 정권의 정통성이 결여돼 있었다. 따라서 국민들에게 뭔가를 보여 줘야 했다. 그중 가장 큰 것이 보릿고개를 없애는 일이었다. 식량을 축내는 쥐잡기 운동, 건강에 좋은 혼
·분식장려, 쌀막걸리 금지, 농촌엔 소주밀식, 건답직파가 구호로 내걸렸다. 그 중 백미는 통일벼정책이다. 노란 완장은 통일벼모판인지 아닌지 살펴보고 누구나 통일벼를 심으라 했다. 목표는 달성했지만 과정의 폭력성은 인간이기를 거부한 것에 다르지 않다. 아버지의 모판을 짓이겨 놓은 노란완장의 ‘지도’를 엄청난 권력이라 생각했고 그 폭력 앞에 꼼짝 못하는 아버지의 무력한 모습에서 비애를 느껴야만 했다.

문민정부에서 교육부장관을 지낸 김숙희 교수는 한 사석에서 영양학자로서 혼식과 분식이 쌀밥보다 영양가치가 떨어진다고 주장해 박정희의 미움을 샀노라고 했다. 조용히 하지 않으면 잡아넣겠다는 으름장을 놓기까지 했다며 웃었다. 자신은 학자로서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그때도 혼·분식이 영양적으로 좋다고 곡학아세하는 학자들이 권력의 폭력을 조장했다. 4대강의 자연에 대한 국가폭력에도 양심 없는 학자들이 앞장 섰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지나간 역사에서 권력의 폭력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에 대해 알고 있다. 80년 광주의 폭력은 그 대표적인 예다. 이후 우리는 민주라는 것에 눈을 떴고 일정정도 민주화를 이루어 냈다. 그러나 지금이라고 권력의 폭력은 누그러들었는가. 인권은 무시하기 일쑤며 시위는 차단되고 제압됐다. 차라리 최루가스를 사용하느니만 못한 차단벽 앞에서 시위자들은 무력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쌀개방 선언은 또 다른 폭력의 행태다. 못자리를 발로 밟을 때와는 전혀 다른 반대의 정책이지만 폭력의 형태는 다르지 않다. 쌀을 농민들이 생산하는 한 정부는 골치를 앓아야 할 것이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선 모를 내지 못하도록 못자리를 밟아야 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아니 논 자체를 떠밀어버리게 될 것이다.

민주화는 권력을 끊임없이 축소하려하기에 정권은 쉽게 폭력이라는 수단으로 유지하려든다. 국가의 일방적인 허용된 폭력이 있는 한 쌀자급의, 식량주권의 실현은 어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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