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흙바람 27회

  • 입력 2014.07.20 20:46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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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밖으로 남원이라는 표지가 나오고 선택은 이형제 선생을 생각했다. 그 곳 어디쯤에서 농촌운동을 하고 있을 선생과 몇 차례 편지를 주고받다가 한동안 소식이 끊긴 상태였다.

“정형, 뭔 생각에 그리 잠겨 있소?”

인섭이었다.

“여기 아는 분이 살고 있어서 잠시 그 분 생각을 했소.”

“호오, 정형 발이 생각보다 넓구만. 나도 예까지 와보는 건 처음인데. 곧 우리가 내릴 역이 되는가보오. 구례역이라던데. 듣기로는 전라도에서도 아주 시골이라 합디다.”

선택이 속한 조가 도착한 마을은 여러 모로 고향 마을과 비슷했다. 산굽이를 따라 이어진 백여 호의 집들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산촌이었다. 산촌이면서도 마을 앞은 구불구불한 논배미가 꽤 넓었고 한창 보리가 익어 구수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보리를 베는 사람들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마을에서 선택은 보름을 지냈다. 농민들의 현실은 비참했다. 한글을 배우러 온 마을의 청년이나 장년들은 가갸거겨를 배우는 데는 거의 열의가 없었다. 관에서 학생들의 활동에 적극 참가하라는 지시가 떨어져 하는 수 없이 나온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그나마 초저녁부터 꾸벅꾸벅 조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거기에 대고 한글을 가르친다는 게 도무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선택의 조는 긴급히 회의를 가졌다.

“지금 우리가 이분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짧은 기간 안에 될 리도 없고 힘든 일에 찌들어서 공부가 될 리도 없을 겁니다.”

조장을 맡은 선배의 말에 조원들 모두 공감했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안 할 수는 없었다. 선택은 조심스레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제 생각엔 우리가 가르친다는 생각을 버리고 이분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 농촌활동의 목적이 농민들이 처한 현실을 알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모색하는 것이라면 우선 이분들을 통해서 우리 농촌현실을 파악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선택의 제안으로 한글강습반은 즉석에서 농촌조사반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저녁에 모인 마을사람들에게 농촌에서 겪는 어려움을 듣기로 했다.

“뭐시가 젤로 힘드냐고? 글씨, 먹고사는 게 젤로 힘들지, 뭐시겄어? 서울 사는 학생들이야 몰르겄지만.”

서울에 사는 친구들은 멀뚱히 눈을 뜨고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선택은 알고 있었다. 농사를 지어서 삼시 세끼 밥을 먹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보릿고개가 얼마나 넘기 어려운 배고픈 고개인지 잘 알고 있었다. 선택의 집은 밥을 굶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고향 마을에 사는 대다수의 농민들이 그러했다.

“한 해 농사를 지어서 일년 양식도 하지 못하는 농가가 어느 정도 되나요? 그러니까 이 마을에서 그런 농가가 많은가요?”

철이 없어서가 아니라 진정 몰라서 어느 서울내기가 물었다.

“글씨, 제 땅서 모도시 농사지은 걸로 치믄 일 년 양석은 될 거인데, 고것이 고렇게 안되니께 문제지. 장리쌀 내묵은 게 있으니께 해마다 반절은 그리 나가고, 해마다 고렇게 되니께 양석이 안 되는 거시지.”

들어도 무슨 소린지 모르는 조원들은 나중에 따로 토론을 했다. 조원 중에 그나마 그런 내막을 잘 아는 게 선택이었다. 실제로 보고 들은 것과 이형제 선생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장리쌀이라는 게 뭐냐 하면 일종의 고리채입니다. 쌀이나 보리 같은 곡식을 빌어서 우선 양식을 하고 나중에 추수 후에 갚는 것인데 그 이자가 보통 오할입니다. 그러니까 한 가마를 빌리면 한 가마 반을 갚아야 하는 것이지요. 한 번 이 고리채를 쓰기 시작하면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덫이 되고 맙니다.”

“그런 고리채를 쓰는 농민들이 얼마나 될까요?”

누군가 물었다.

“제가 알기로는 거의 대다수 농민들이 그런 처지라고 보면 됩니다. 아마 가장 심각한 농촌 문제가 그것일 겁니다.”

선택의 말에 다른 조원들은 좀 아연한 표정이었다.

“오 할이나 되는 장리쌀을 사먹으면 당연히 안되는 거 아닙니까? 좀 어렵더라도 그런 빚을 내면 안 되지요.”

누군가 그런 말을 했고 선택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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