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흙바람 18회

  • 입력 2014.05.18 21:28
  • 수정 2014.05.18 21:30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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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서 얼른 고개를 들어 보았지만 이어서 몇 방울의 피가 더 떨어져서 답안지 위에 붉게 퍼졌다. 순간, 고개를 뒤로 젖히면서 큰일이 났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아뜩해졌다. 코피가 문제가 아니었다. 시험 규정 상 시험지와 답안지는 단 한 번만 제공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올려다 본 교실 천정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양쪽 옆에서 시험을 보는 아이들은 책상에 고개를 처박고 있을 뿐 선택이 처한 곤경을 알아채는 사람은 없었다. 교실 앞뒤로 왔다 갔다 하는 시험감독 선생님을 부르려고 입을 움직이려 했지만 비릿한 코피가 자꾸 목울대로 넘어가고 있었다.

“서, 선생니임.”  간신이 목소리가 밖으로 나와 주었다. 그제야 옆에 앉아있던 학생이 선택을 돌아보았고 감독 선생님이 다가왔다. 그는 이내 사태를 알아차리고 주머니를 뒤졌다.

“자, 이걸로 우선 코를 막고 진정을 시켜보게.”


선생님이 내준 것은 손수건이었다. 선택은 깨끗하게 개켜진 손수건에 피를 묻히는 게 저어되어 쉽게 코로 가져가지 못했다. 젖혔던 고개를 내리자 다시 코피가 주르르 흘렀다. 엉겁결에 손수건을 대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가끔 코피가 나기는 했다. 할아버지는 선택이 이유 없이 코피를 흘릴 때마다 혀를 찼고 어머니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아주 어릴 적, 어머니 등에 업혀 지낼 때였다고 했다. 여름에 밥을 짓기 위해 불을 때면 보릿대 등속을 땔감으로 삼았는데 매운 연기가 나기 마련이었다. 어른이야 늘 하는 일이라 참는다지만 등에 업힌 아기는 눈이 매워 울며 발버둥을 칠 수밖에 없었다. 좁은 정지에서 밥은 끓여야지, 금방 타는 보릿대는 연신 집어넣어야지, 구름처럼 이는 연기에 눈물콧물을 짜내는데, 등에 업힌 아기는 자꾸 뒤로 뻗대니 오죽이나 힘에 겨울 것인가. 때로는 짜증이 나고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날도 푹푹 찌는 어느 날, 어머니는 울며 뻗대는 등에 업은 아기에게 불뚝 짜증이 일어서 신고 있던 고무신을 벗어 뒷손질로 툭 쳤더란다. 그런데 그 손속에 살이 끼었는지 신발이 아기 코에 정통으로 맞았고 아기가 흘렸다고 하기에는 과할 만큼 코피를 쏟았다는 것이었다. 어린 선택을 장손자로 금이야 옥이야 하던 할아버지는 사람을 보내 의원까지 불렀고 어머니는 죽을죄를 지은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선택이 열댓 살을 넘으면서 까닭 없이 코피를 흘리는 일이 생기자 할아버지는 십여 년 전의 그 일을 잊지 않고 어머니를 흘겨보곤 했던 것이다. 선택은 그럴 때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어머니 편을 들었지만 어머니는 그래도 죄지은 사람 같은 표정이 되곤 했다.

“선생님, 시험지 괜찮을까요?”

코피가 진정되고 선택은 기왕 내친 김에 피로 얼룩진 손수건으로 시험지 위에 떨어진 피를 닦아보았다. 하지만 마분지로 된 시험지 위에 번진 피는 이미 손을 쓸 수 없을 정도였다. 절망감이 밀려왔다. 감독 선생이 선택의 시험지를 유심히 보는가싶더니,

“이런 경우는 특별한 예외니까, 시험지를 새로 내주겠네. 하지만 시간을 더 줄 수는 없으니까, 남은 시간 안에 다 풀어야 할 걸세.”  하고 새 시험지를 주었다. 여벌로 두어 개가 더 있었던 모양이었다. 선택으로서는 그야말로 기사회생이었다. 시간이라면 절반 정도 남은 지금이라도 자신이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감독 선생은 수학 담당이었고 선택이 풀어낸 문제를 보고 속으로 놀랐다고 했다. 그래서 선뜻 자기의 판단으로 원래 다시 줄 수 없는 시험지를 내주었다는 것이었다. 시험에 미응시한 수험생이 있어서 남은 여분의 시험지였다. 선택에게는 고등학교 시험에서 귀인을 만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선택은 시험을 마쳤다. 수학 말고는 자신할 만한 과목이 없었다. 육중한 교문을 빠져나오며 선택은 극심한 피로를 느꼈다. 코피까지 쏟으며 긴장했던 시험이 끝나자 어디든 주저앉고 싶을 만큼 피곤했다. 게다가 매운바람에 눈발까지 섞여 춥고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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