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학살, 저무는 갑오년

동학농민혁명 9

  • 입력 2014.05.02 22:19
  • 수정 2014.05.02 23:01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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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본다
들것에 실려 서울로 압송되어 가는
그의 얼굴에서
두 개의 눈을 본다
양반과 부호들에 대한 증오의 눈을
가난한 민중에 대한 사랑의 눈을
(김남주 시 ‘녹두장군’ 중)

▲ 그림 박홍규 화백

혁명 기간을 통틀어 어느 정도의 농민들이 죽어갔는지는 여전히 정확히 알 수 없다. 당시의 기록도 20만에서 40만까지 기록하고 있다. 박은식은 조선통사에서 30만으로 추정하거니와 당시 조선 백성 전체가 채 천만이 되지 않은 점으로 볼 때, 그 숫자는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특히 호남에서 죽어간 농민들의 수가 너무도 막대하여 혹자는 민족의 알갱이가 이 때 모두 스러져갔다고 한탄하기도 한다. 이후의 의병과 독립운동으로 이어진 지난한 투쟁에서 남은 이들도 또한 피를 흘리고 쓰러졌으니, 우리의 근대사는 실로 참혹하였다.

우금티에서 농민군이 패퇴한 이후, 농민군에 대한 학살은 집요하고도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일본군과 관군, 민보군들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잔인하고 조직적인 학살을 자행했다. 1차 봉기가 반봉건이었음을 분명히 기억하는 사족들은 수명이 다해가는 신분제도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왜군의 앞잡이가 되어 농민군을 수색하고 처단하였다. 조선 산천이 피로 물든 겨울이었다.

개남아, 김개남아

한편, 우금티에서 전봉준이 눈물을 머금고 후퇴할 때 또 다른 주력부대인 김개남 부대는 어디에 있었을까. 10월 14일 남원을 출발한 팔천여 김개남 부대는 파죽지세로 회덕과 유성을 휩쓸고 11월 12일 청주 인근에 나타났다. 청주성에는 대부분의 병력이 공주를 사수하기 위해 빠져나가고 일본군 중대병력과 소수의 관군만이 지키고 있었다. 실제로 김개남이 한양으로 쳐들어가는 길을 청주 쪽으로 잡은 것은 전략적으로 큰 무리가 없는 진격로였다. 청주성 역시 일대 결전을 치러볼 만한 장소였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일본군의 화력이 문제였다. 매서운 기세로 돌진한 농민군이 청주성 코앞에 이르렀을 때, 일본군의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남원의 농민군이 일찍이 접해보지 못한 무서운 사격이었다.

가장 전투적이라고 불리던 김개남부대는 일본군에 대하여 충분히 알지 못했다. 이전 전투에서 승리했던 경험으로 일본군 또한 쉽게 무찌를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에 차 있었으나, 막상 엄청난 일본군의 화력을 직접 대하자 쉽게 무너졌다. 기록에는 담배 한 대를 다 피울 참이 못 되어 등을 돌리고 달아났다고 하나, 그는 오만에 찬 승자의 기록일 것이다. 그렇더라도 별다른 왜군의 피해도 보고되지 않았으니 김개남부대가 속절없이 패배한 것은 분명하다. 첫 전투에서 물러난 부대가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다시 맞섰으나 그 역시 오래 가지는 못하였다. 결국 청주에서 물러난 김개남부대는 대오가 흩어져 다시 부대의 위용을 찾지 못했다. 전봉준이 우금티에서 패배한 이후에 후퇴하면서 지속적으로 군사를 모집하고 끈질기게 전투를 벌이며 대오를 유지한 것과는 다른 국면이었다.

혁명적 시기에 지도자의 안목은 늘 갈라지게 마련이다. 전봉준처럼 전체를 조망하면서 현실조건에 맞게 지도력을 발휘하는가 하면, 김개남처럼 혁명의 대의에 어긋남 없이 비타협적으로 싸우는 지도력도 있다. 어느 것이 옳았느냐는 역사의 굴곡마다 다른 평가가 나오게 마련이다. 다만, 김개남이 택한 청주 진격로를 전봉준이 수용하고 북접과의 긴밀한 협력 하에 신속하게 치고 올라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은 쉽게 떨칠 수가 없다.

이후 김개남은 남원으로 퇴각하였다가 태인으로 잠입하였다. 그곳에는 매부와 친한 친구 임병찬이 있었다. 그러나 임병찬은 이미 김개남과는 다른 뜻을 품고 있었다. 친구를 유인한 그는 급히 관찰사에게 밀고하여 80여 명의 관군들이 은신처로 달려왔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된 것을 깨달은 김개남은 태연하게 오라를 받았다. 관군은 김개남의 손톱 밑에 대못을 박고 서까래에 묶은 다음 짚둥우리를 얹은 소달구지에 실어 압송했다. 그 모습을 본 백성들이 한탄하여 노래했으니,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수만 군사 어데 두고/짚둥우리가 웬 말이냐’ 고 불렀다 한다. 안타까움과 절망이 묻어나는 서러운 가락이었을 것이다.

김개남을 체포한 관찰사 이도재는 재판도 없이 전주 감영에서 김개남을 즉결 처형하였다. 한양으로 압송하다가는 도중에 불상사가 일어날 우려가 있다는 이유였다. 이는 호남 일대에서 김개남이 가진 신망이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김개남의 배를 갈라 동이에 내장을 받았고 원한이 깊은 양반들이 간을 씹었으며 고기를 나누어 제사상에 올렸다 하니 그가 양반들에게 얼마나 철천지원수였는지 알 수 있다. 그의 잘린 머리만 서울로 올라가 혁명동지 전봉준, 손화중의 머리와 함께 저자에 걸리게 된다.

훗날의 일화지만 김개남을 밀고한 임병찬은 나중에 의병장이 되어 일제와 싸우다 순국하였다. 김개남이 타파하고자 했던 왕조와 봉건제를 지키려던 그도 나라가 외세에 짓밟히자 분연히 일어나 싸웠고 목숨을 바쳤다. 조금 더 각성하여 동학군이 될 수도 있었건만, 시대와 자신의 계급적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마지막 혈전

농민군의 또 다른 지도자 손화중과 김경선은 나주에서 일군에 패하고 장흥의 농민군과 합류하였다. 농민군은 12월 4일 벽사를 점령하고 장흥부로 진격하였고 총공격을 감행하여 이튿날 마침내 성을 함락하였다. 이어서 강진을 점령하며 기세를 올렸으나 뒤이은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으로 퇴각하였다. 전열을 재정비한 농민군은 12월 15일, 수만 명의 병력으로 장흥 석대들판을 가득 메우며 장흥부로 진격해 갔다. 실로 장엄하면서도 피눈물 나는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우금티에서도, 청주성에서도, 이곳 석대들에서도 흰옷 입은 농민군의 가슴에 일본군 구르프 기관총과 무라다 소총에서 발사된 총알이 날아와 박히기 시작했다. 기관총 하나면 천 명의 농민군을 대적할 수 있었다. 아니, 수천의 농민군이 그 무서운 기관총을 보지도 못하고 낙엽처럼 스러져갔다.

전투가 아닌 학살이었다. 화승총과 죽창, 심지어 몽둥이를 든 농민군 3만 명이 석대 들녘에 붉은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겨우 살아남은 농민군이 강진과 해남으로 도망쳤지만 해남 앞바다에 대기하고 있던 일본군은 그들을 쫓아 잔인한 학살극을 되풀이했다. 그야말로 처절한 갑오년 최후의 혈전이었다. 갑오년이 완전히 저물어가던 12월 20에서 그믐날에 이르기까지 관군과 일본군은 남도 일대를 집집마다 수색하여 날마다 수십 수백 명씩 학살하였다. 처형 방식도 끔찍하기 그지없어, 화형과 생매장, 사지를 찢어죽이거나 산 채로 내장을 꺼내 죽이기 등 실로 상상을 초월하였다. 이는 나중에 일제가 감행한 숱한 집단 학살이나, 한국전쟁 전후의 양민학살의 원형이라 할만 했다.

갑오년이 갔다.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했고 가장 잔인한 해였다. 그렇다면, 그냥 맥없는 한 해가 지듯이 시나브로 스러져갈 갑오년일 수 없었다. 잠시 사그라지더라도 다시 살아오는 갑오년일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그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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