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흙바람 17회

  • 입력 2014.05.02 18:52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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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잠이 들었던 것일까, 선택이 눈을 떴을 때 아직 방안은 어두웠다. 옆에 누운 한규는 여전히 가볍게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선택을 깨운 것은 귀에 익지 않은 어떤 소리였다. 전에 서울에 올 때 지겹도록 흔들리며 타고 왔던 트럭 소리, 바로 그것이었다. 잠시 끊겼다가 이어지며 차 소리가 간단없이 들려왔다.

잠시 후, 안방에서 괘종시계가 여섯 번 울었다. 여섯 시면 일어날 시간이긴 했다. 아랫배가 무지근하니 오줌이 마려웠다. 그다지 춥지는 않았지만 남의 집에서 남 먼저 일어나 변소를 간다는 게 썩 내키지 않아서 선택은 어둠 속에서 눈을 뜬 채 가만히 누워 있었다.

잠시 이불에서 손을 빼어 머리맡에 풀어두었던 손목시계를 더듬어서 찾았다. 얼마 전에 할아버지가 사준 시계였다. 쇠줄로 된 묵직하고 빛나는 시계를 처음으로 손목에 차자 갑자기 어른이 된 기분이 들었었다. 다른 사람이 보는 데서 손목을 슬쩍 걷으며 시계를 쓰윽 보는 기분이란 우쭐한 짜릿함이었다.

“열아홉이믄 으른이다. 옛날 같으면 성혼할 나인데, 인제서 학교엘 가니 이를 어쩌누.”

할아버지는 여전히 선택의 서울 유학행에 대해 조금은 마뜩찮아 했지만 시계를 선물함으로써 언제나처럼 선택의 편이 되어주었다. 선택은 가만히 시계를 손목에 찼다. 밤새 차가워진 금속이 따뜻한 살에 닿는 느낌이 선득했다.


조금 후, 방안이 갑자기 환해졌다. 문창호 밖 쪽마루 위에 환한 등이 들어오고 누군가 부엌으로 들어가는 기색이었다. 조반을 짓기 위해 아주머니가 일어난 것일 거였다. 선택은 일어나서 주섬주섬 옷을 꿰입었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갔다. 거의 동시에 안방 문이 열리면서 아저씨가 나왔다.

“일찍 일어났구나. 잠은 잘 잤어?”

집에서 할아버지에게 하던 대로 선택은 두 손을 아랫배에 모아 붙이고 허리를 꺾어 인사를 했다.

“예, 안녕히 주무셨는지요?”

아저씨는 좀 당황한 빛으로 다가와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그 날 아침을 먹고 선택은 청량리까지 가는 아저씨의 출근길에 맞추어 함께 전차를 탔고 종로에서 내렸다. 아저씨가 일하는 철도역은 전차 종점까지 가야 해서 둘은 전차 안에서 헤어졌다.

전에 원서를 가지러 왔을 때도 느낀 거지만 학교는 엄청나게 컸다. 이만한 건물은 서울에서도 드물 거라고 혼자 생각을 하며 이 학교에 다니게 된다면, 정말 마을 사람들이 하는 말처럼 출세길로 들어서는 걸지도 모른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렇다면 오늘 시험에 인생이 걸렸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아니, 선택의 심정은 실제로 그렇게 절박했다.

시험 시간보다 한 시간도 더 일찍 온 터라 아무도 없을까 걱정했는데 시험을 치러온 게 분명한 수험생들이 이미 꽤 눈에 띄었다. 안내에 따라 들어간 교실에는 벌써 난로가 타고 있었다. 난로 옆 양동이에는 조개탄이 수북하게 담겨 있었다. 처음 보는 신기한 연료였다.

겨울 동안에 두어 번 시골 학교에서도 석탄을 땐 적이 있었다. 아마 어딘가에서 배급을 받아오는 모양이었는데, 교장이 자기 집으로 빼돌리고 조금만 학교로 가져온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가루로 된 석탄을 물에 반죽하여 장작불이 타는 난로에 퍼서 얹으면 학교가 파하도록 뜨거운 열기가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시커먼 밀가루 반죽 같은 게 불이 붙어 그렇게 타오르는 게 신기하기만 했었다. 그런데 서울은 그냥 집어넣기만 하면 되는 조개탄이 타고 있었다.

교실에 가득 수험생이 자리 잡고 시험이 시작되었다. 잔뜩 겁을 먹었던 깐으로는 문제들이 쉽게 눈에 들어왔다. 둘째 시간에 수학 시험지를 받아들고 선택은 아, 이제 되었다, 라고 가만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수학에 자신이 있기도 했지만 눈으로 훑어본 문제는 어느 것 하나 그다지 어려운 게 없었다. 선택은 그래도 신중을 기해서 한 문제 한 문제 신경을 곤두세우고 풀어나갔다. 절반쯤 문제를 풀었을까, 갑자기 콧물이 나오는 것 같아서 손을 코로 가져가는데 어떻게 해볼 틈도 없이 흐드득, 코피가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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