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한의 우금티, 농민군의 패배

동학농민혁명 8

  • 입력 2014.04.20 22:44
  • 수정 2014.04.20 22:49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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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이었는지 몰라라
우리에게 넘을 수 없는 무엇이 생긴 것은
그 날이었는지 몰라라
우리가 우리의 죽은 몸 위에 가시덤불로 피어
넘을 수 없는 무엇을 넘기 시작한 것은
(김진경 시 ‘우금치의 노래’ 중)

120년 전, 갑오년 초겨울의 그 며칠이 아니었으면 우금티는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공주의 낮은 언덕에 그쳤으리라. 지금은 고개 아래 터널이 뚫리고 고갯마루에는 그 날의 전투를 기념하는 위령탑이 서 있다. 공주는 북으로 금강이 흐르고 나머지 삼면은 험준한 산과 고개로 막혀 굳이 성을 쌓지 않고도 길목만 방비하면 뚫기 어려운 곳이다.

이곳에서 동학혁명 전 기간에 걸쳐 가장 치열하고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다. 수만 농민군의 시체가 들판을 뒤덮고 피가 흘러 개울을 이룬 곳, 그 곳에 말없이 선 위령탑은 일 년 내내 인적이 드물다. 어느 시인이 읊었듯이 우리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까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바로 그 갑오년이건만.

한양까지 쳐들어가기 위해 북상한 전봉준의 농민군은 공주에 이르렀을 때 그 수가 4만으로 불어나 있었다. 공주 유생 이유상은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집결해 있던 부여 건평 유회군 200여 명을 이끌고 논산의 동학농민군 연합 부대에 합류하기도 하였다. 토벌군이 오히려 농민군의 편에 선 것은 2차 봉기가 외세를 겨냥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종의 반일 연합전선인 셈이었다.

죽창과 기관총의 싸움

동학농민군이 논산을 떠나 공주로 진격하던 시기, 충청감영에는 이미 서울에서 내려온 경군과 일본군에 의해 방어선이 구축되어 있었다. 일본은 제19대대에 동학농민군을 모두 살육하라는 훈령을 내렸으며, 서울에서 세 길로 나누어 압박하면서 동학농민군을 남쪽 바다로 몰아 몰살하겠다는, 일명 ‘청야작전’이라는 구체적인 전술까지 마련하고 있었다. 그 결과 10월 24일부터 미나미가 이끄는 부대가 공주에 도착하고 있었다. 조선 관군이 대략 3천 2백 명이었으며, 일본군은 2천여 명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

10월 25일, 농민군은 공주로 넘어오는 고개인 능치를 향해 밀려왔다. 관군이 기록하기를,

‘깃발이 무수히 꽂혀있는 것이 수십 리에 걸쳐있고 산에 올라가 있는 자들은 서 있는 것이 병풍이 둘러쳐져 있는 것 같았다. 진루에는 불빛이 수십 리를 비쳤고 인산인해를 이루어 강가의 모래알과 같았다’고 했으니 농민군의 숫자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숫자가 아니라 화력이었다. 고작해야 화승총과 죽창을 든 농민군은 애초부터 일본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잘 훈련된 일본군의 대포와 기관총 앞에서 농민군은 그야말로 추풍낙엽이었다.

게다가 이미 양력으로 12월에 접어든 날씨는 매섭게 추웠다. 짚신이나 헝겊으로 감은 발은 오랜 행군과 험한 산을 오르면서 모두 헤어졌고 맨발인 이들이 태반이었다. 농민군은 능치를 중심으로 삼면을 포위하고 짓쳐 들어갔으나 선봉에서 공격하는 일본군과 좌우에서 협공하는 관군을 뚫을 수 없었다. 게다가 능치는 천연의 요새였다. 밀고 밀리는 싸움에 농민군의 시체는 쌓여만 갔다.

다음날까지 패배를 거듭한 농민군은 논산으로 물러났다. 1차 공주 접전은 농민군의 패배로 막을 내렸고 전봉준은 흩어진 농민군을 모아 다시 재기에 나섰다. 훗날 공초에서 전봉준은 ‘만여 명의 군사 중에 남은 자가 삼천 명뿐이었다’고 진술한 바 있다.

동학농민군은 논산에서 약 1주일 동안 전열을 재정비한 뒤 11월 8일 공주를 향해 최후 결전을 감행하였다. 이들은 우선 이인에 주둔하고 있던 관군 부대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관군은 동학농민군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퇴진하였으며, 승기를 잡은 동학농민군은 이인 인근 산으로 올라가 일제히 횃불을 들어 올렸다. 수많은 횃불로 인해 인근 산은 마치 화성(火城)과 같았다고 한다.

갑작스런 동학농민군의 공격에 놀란 관군은 우금티, 웅티, 효포 봉수대로 이어지는 방어선을 구축하였으며, 모리오가 이끄는 일본군도 우금티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인 전투의 승리로 자신감을 되찾은 농민군은 모든 병력을 모아 우금티로 진격하였다. 11월 9일 오전 10시 경이었다.

처절한 패배

전봉준이 이끄는 주력부대는 일본군과 마주보이는 건너편 산 아래 진을 쳤다. 이날 정오가 되기 전에 일본군은 높은 지형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대포를 쏘아댔다. 사거리가 수백 미터나 되는 기관총도 불을 뿜었다. 농민군은 쓰러진 시체를 넘으며 수십 차례나 진격하다 밀리기를 반복했다.

전봉준은 붉은 덮개가 휘날리는 가마 위에서 온힘을 다해 전투를 지휘했다. 그의 주위에는 독전대가 북과 꽹과리를 두드리고 날라리를 불었다. 대포소리와 총소리가 뒤섞여 우금 고개 일대는 지옥 같은 아비규환으로 변해갔다. 간밤에 눈이 내려 농민군은 동상 걸린 발로 산을 오르다가 붉은 피를 뿌리며 쓰러져 갔다.

일본군은 능선에 몸을 감추고 있다가 농민군이 다가오면 일제히 일어나 구령에 맞추어 사격을 가한 후 다시 몸을 감추었다. 일본군이 가진 개인 화기는 1초에 한 발씩 총알을 쏠 수 있는 무라타와 스나이더였다. 그들이 일제히 총을 쏠 때마다 농민군의 살이 튀고 전열은 흐트러졌다. 농민군은 능선에 숨은 일본군을 타격할 아무런 수단도 없었다. 전투가 아니라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다.

그래도 농민군은 쉬지 않고 우금티를 넘기 위해 밀려오고 또 밀려왔다. 한때 농민군 이백여 명이 우금티 정상 직전까지 올라갔으나 끝내 재를 넘지는 못했다. 일본군은 전봉준부대를 향해 근접 사격을 시작했고 그토록 용맹하게 싸우던 농민군도 마침내 무너져 내렸다. 일본군의 사거리를 벗어나지 않으면 전멸이었다. 한 번 진용이 무너지자 걷잡을 수 없는 공포가 되어 농민군은 죽기 살기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죽음을 각오한 결사대 오백여 명만이 전봉준을 호위하여 이인까지 후퇴하였다.
처절하고 뼈아픈 패배였다.

두 차례에 걸친 공주 전투는 동학농민혁명 전 기간에 걸쳐 규모면에서도 4만 명이 넘는 최대 규모였으며, 전봉준이 이끄는 주력 부대와 교단의 북접 부대까지 가세한 연합 부대가 모든 역량을 쏟아 부은 전투였다. 우금티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서 동학농민혁명은 결정적으로 막을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4일간의 처절했던 우금티 전투에서 패배한 동학농민군은 이인·경천을 거쳐 11월 12일 노성에 이르러 진영을 재정비하고자 하였다. 이곳에서 전봉준은 대일연합전선을 호소하는 고시문을 발표했으나, 이미 전세가 기울어진 상황에서 호응하는 세력들을 결집할 수 없었다. 결국 노성에서 논산 대촌으로, 이어 소토산에서 황화대까지 관군과 일본군의 토벌대에 밀려 후퇴하였다. 퇴각하는 동학농민군에 대한 관군과 일본군의 소탕은 학살 그 자체였다.

이때의 정황을 이두황은 ‘남은 도둑 천여 명이 여지없이 무너졌는데 새벽하늘에 별이 없어지는 것 같았고, 가을바람의 낙엽과 같았다. 길에 버려진 총과 창, 밭두덕에 버려진 시체가 눈에 걸리고 발에 채였다’고 기록하였다. 갑오년이 저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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