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접, 반침략의 깃발을 함께 들다

동학농민혁명 7

  • 입력 2014.04.07 00:02
  • 수정 2014.04.07 00:03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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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목까지 온통 부둥켜안고
  목발 절룩이며 휘청거리며
  지친 동학군 쫓겨 가던 길
  무리무리 의병들 숨어 넘던 길
  그리워 그리워 노래 부르며
  언젠가 오지게 오지게 터지고야 말
  골짝물도 엎드려 포복하는 길
                   (이은봉 시 ‘갑사 가는 길’ 중)

 

정국은 바야흐로 요동치고 있었다. 그토록 막강해보이던 청나라가 너무도 손쉽게 일본에 무릎을 꿇자, 조야는 퍼뜩 놀라고 말았다. 조선이 일본의 사나운 군홧발 아래 놓이게 되었다는 사실이 자명해진 것이다. 대원군은 이미 힘 잃은 청국을 다시 끌어들이고 농민군과 세를 합쳐 일본을 몰아내려 시도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었다. 조선 천지에 일본과 맞서 싸울 세력은 오직 농민군 외엔 없었다. 

  강대한 외적이 침략했을 때는 언제나 그러했다. 몽골제국이 쳐들어왔을 때 강화도로 도망간 지배층을 대신해 싸운 것도 백성들이었으며 임진년 왜란 때 역시 존망의 기로에서 나라를 구한 것은 전국에서 떨쳐 일어난 의병이었다.

  이제 또 한 번 외적에 맞선 힘겨운 싸움이 농민들 어깨에 걸렸다. 반외세와 반봉건이라는 이중의 무거운 과제 앞에는 죽음만이 놓여있는 줄 알면서도 비껴갈 수 없는 길이었다. 인간의 역사는 언제나 그렇게 죽음을 넘어서 이루어진다.

      곡식이 익기를 기다렸다   

  전봉준의 훗날 취조를 받으며 곡식이 익기를 기다렸다가 9월에 봉기하였다고 진술했다. 물론 그도 한 이유였고 청일 전쟁의 추이를 지켜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수만, 수십만의 목숨이 걸려있는 전쟁을 시작하려는데 한 인간으로서 어찌 고뇌가 없었을 것인가. 전봉준은 그 엄청난 역사의 중압을 뚫고 마침내 2차 농민전쟁을 선언했다. 

  “일본군을 몰아내고 친일개화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삼례로 모이라!”
  전봉준은 각지로 통문을 돌렸다. 지금의 전북 완주군 삼례읍은 전라도와 충청도를 잇는 교통의 요충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곳이며 역말이 있어서 묵을 수 있는 장소가 많았다. 삼례에는 속속 농민군이 모여들어 숫자가 사천여 명에 이르렀다. 

  삼례에 농민군의 주력부대인 김개남 군이 오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은 훗날 많은 논쟁과 추측을 낳았는데, 이는 아직도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전술전략 상의 이견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밀고 밀리는 싸움에서 김개남부대의 부재는 특히 아쉬웠다. 또 다른 주력부대인 손화중과 김경선 부대 역시 삼례에 오지 않았는데, 이는 일본군이 바닷길을 통해 나주 해안으로 공격해 올 거라는 정보에 따라 그쪽을 방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전봉준 휘하에 모인 사천의 농민군은 세력이 약했다. 남접 전체의 삼분지 일 정도 되는 세력으로 일본군과 맞서 싸울 수 있을 것인가. 사태는 비관적으로 보였다. 

  물론 삼례의 농민군이 고립무원은 아니었다. 1차 봉기 이후 전국 각지에서 끊임없이 농민군이 일어났다. 경상도에서는 화개, 하동, 진주, 남해, 성주 등지에서 동학농민군이 봉기했고 강원도에서는 원주, 영월, 평창, 정선, 횡성, 강릉 ,양양 등에서, 경기도에서도 안성, 양지, 이천, 지평 등 전역에서 잇달아 농민군이 봉기하였다. 평안도와 황해도에서도 대규모 봉기가 일어나 관아를 습격해 수령을 목 베었다. 그야말로 조선 전역에서 들불처럼 봉기가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탁월한 지도력이 부재한 곳에서 지속적인 승리가 이루어질 수는 없었다. 2차 봉기에서 승패를 가름할 결정적인 곳은 역시 전봉준이 집결을 호소한 삼례였고 관군과 일본군 또한 그들의 칼끝을 삼례로 겨누었다.

  결정적인 원군은 그 동안 소극적이다 못해 반봉기의 입장을 취하던 북접 지도부의 결정이었다. 최시형이 이끄는 북접 지도부는 집강소 기간 동안 계속 남접의 행동을 견제했다. 그들은 호남에 있던 북접 계통의 동학교도들에게 봉기에 참여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양반이나 관리를 능욕하는 일을 엄히 금지했다. 남북접의 갈등은 점점 심화되어 전봉준은 최시형의 명령을 무시하고 직접 접주를 임명하기도 했다. 

  이러한 갈등관계를 해소시켜 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관군이었다. 그들에게 남북접의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저 모조리 토벌해야할 대상이었을 뿐이었다. 이미 기독교와 천주교가 공인되어 자유롭게 포교를 하게 된 마당에도 동학은 여전히 사문난적의 역도들이었던 것이다.    

      침략군과 칼을 맞대다
 
  ‘지금 관리의 침학이 심하여 우리 부모처자로 하여금 구렁에 떨어지게 하니……,우리 무리가 포(包)를 일으켜 저 화를 제거하고자 하니, 선생은 허락하소서’ -<천도교교회사> 중

  관군들은 경기, 충청도의 동학교도들을 남김없이 토벌하고 남진하였다. 죄 없는 양민을 학살하고 민가에 불을 지르는 등 그 만행이 말할 수 없이 자심하였다. 이에 참지 못한 북접 교도들이 위와 같은 요구를 최시형에게 했던 것이었다. 최시형도 이 요구를 저버릴 수 없었다. 북접의 지도부와 달리 하부조직에서는 혁명적이고 투쟁적인 분위기가 끓고 있었고 지도부로서도 이 압력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또한 침략세력에 대해서는 북접의 지도부 역시 인식을 같이 하고 있었다. 보은집회에서 내걸었던 척왜양의 기치에 비추어 보아서도, 청일 전쟁 후 일본의 실체를 명확하게 알게 된 지도부로서는 반침략 전쟁의 명분을 외면할 수 없었다. 동학뿐 아니라 유생들과 일부 관료층에서도 반외세, 반침략의 분위기가 팽배해졌고 이는 민족적 위기의식과 맞물려 커다란 파도가 되었던 것이다.

  마침내 최시형은 총동원령을 내렸다. 남북접 연합전선이 형성된 것이다. 북접에서는 손병희를 대통령으로 삼고 경기, 강원, 충청, 경상도까지 망라해 거병하였다. 전봉준은 9월 말 직속부대 사천을 거느리고 삼례를 출발하였다. 여산, 은진을 거쳐 논산에 이르렀을 때 농민군은 만여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가는 곳마다 농민들이 속속 호응해왔던 것이다. 그대로 한양까지 쳐들어가 일본을 몰아내고 낡은 세상을 뒤엎겠다는 의지로 사기가 충천했다. 이윽고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 농민군 수만이 논산에 이르러 남접군과 만났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양쪽의 농민군은 얼싸안고 환호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 광경을 오지영의 ‘동학사’는 이렇게 적었다.

  ‘동학군의 대본영은 논산포에 있었으며 호남 전봉준과 호서 손병희 양 대장이 서로 손을 잡으니 한 번 만남에 간담이 서로 맞고 지기가 부합되는지라. 드디어 형제의 의를 맺어 사생고락을 동맹하니 전봉준은 형이 되고 손병희는 아우가 되었다. 이달로부터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고 같은 장막에서 잠을 자고 기타 모든 일은 동일한 보조를 취하여 나가기로 헸다.’

  두 사람은 약속한대로 생사고락을 함께 하지는 못했다. 동학혁명 후에도 손병희는 살아남아 동학의 명맥을 지키며 3.1운동에 주역으로 참여하였다. 하여튼, 납북접이 손을 맞잡고 드디어 2차 농민전쟁의 깃발이 올랐다. 이른 추위가 다가오던 갑오년 가을, 들판을 피로 물들일 참혹한 전투가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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