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강소, 민주주의의 씨를 뿌리다

동학농민혁명 6

  • 입력 2014.03.24 01:55
  • 수정 2014.03.24 01:56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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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 거센 날 대숲에 들면
            청천까지, 청천까지 찌르는 소리
            홀로서는 힘들다고 잎새 잎끼리 만나고
            흐트러져도 어렵다고 뿌리 뿌리끼리 만나고
            급기야는 저 소리 한 함성 이뤄
            일어서라 일어서라고 부르는 소리
            일어서자 일어서자고 외치는 소리.
                                       (고재종 시 ‘대숲이 부르는 소리’ 중)

 

우리는 파리 코뮌은 알면서 집강소는 잘 모른다. 파리 시민군과 베르사유 군이 싸운 피의 일주일은 알아도 우금티 전투는 오히려 생소하다. 사실 두 코뮌과 전투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코뮌의 내용이나 전투의 규모, 처절함에 있어서 파리의 그것은 갑오년 동학혁명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파리 코뮌은 민주주의 역사에서 오랜 주목과 평가를 받고 있지만 아쉽게도 동학혁명은 그렇지 못했다. 외세를 앞세운 봉건왕조의 탄압과 뒤이은 일제의 강점으로 나라를 잃었던 탓이지만, 그 이후로도 오랜 동안 민주주의를 이루지 못한 우리 현대사에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특별법’이 통과된 것이 불과 10년 전인 2004년이었으니 말해 무엇 하랴. 그때까지 농민군은 공식적으로 난을 일으킨 역적이었을 뿐이었다.

          혁명을 이루기 위하여
 
  전주 화약을 맺은 뒤, 농민군은 흩어져 고향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농민군의 모습은 승리를 거둔 당당하고 신명이 넘치는 걸음이었다. 수십, 수백 명씩 무리를 이루어 칼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모내기가 급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농민군의 자치, 즉 집강소 통치가 시작되었다.

  집강소는 우리 역사상 최초로 인민이 국가권력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치와 자립의 민주주의를 실천했던 기구다. 집강소는 본래 동학혁명 이전부터 향리에 있던 민간의 자치 기구였다. 이것이 농민군에 의해 본격적으로 수령의 권한을 대행하는 조직으로 코뮌화한 것이었다. 수많은 농민군의 피의 대가로 이루어낸 자치권력 공동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집강소는 일종의 혁명정부였다. 행정과 입법, 사법권을 스스로 행사하였고 자체 군사력으로 직접민주주의를 보위하였다.

  집강소는 12개 조의 정강을 발표했는데, 이는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혁명적이었다. 이 정강을 듣는 순간, 봉건제도에 억눌려온 농민과 천민들에게는 하늘의 복음을 듣는 것과도 같은 충격이었으리라. 실로 정강을 읽고 기쁨에 날뛰며 눈물을 흘렸다고들 한다. 그것은 그 이후, 아직도 다 이루지 못한 ‘너무도 아득한 민주주의의 기억’이자 오래된 민주주주의의 원형이었다.

  ‘인명을 함부로 죽인 자는 목 벤다. 탐관오리는 뿌리를 뽑는다. 횡포한 부호배(富豪輩)는 엄하게 징치한다. 유림과 양반배의 소굴을 토멸한다. 잔민(殘民) 등의 군안(軍案)을 불 지른다. 종 문서는 불 지른다. 백정의 머리에 패랭이를 벗기고 갓을 씌운다. 무명잡세 등은 모두 없앤다. 공사채(公私債)를 물론하고 과거의 것은 모두 따지지 않는다. 외적(外賊)과 연락하는 자는 목을 벤다. 토지는 똑같이 나누어 경작한다. 농군의 두레를 장려한다.’  - 오지영의 ‘동학사’ 중

  이 정강을 읽으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 죽음으로도 벗어날 길 없던 군역과 종 문서, 빚더미가 하루아침에 사라진다면 그것이야말로 후천개벽이 아니고 무언가. 게다가 백정의 머리에 갓을 씌운다는 것은 그대로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혁명, 한 주먹으로 봉건체제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하겠다는 선언이다. 게다가 토지를 똑같이 나누어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민주주의의 백미가 아닐 수 없었다. 동학의 인내천 사상은 다름 아닌 민주주의 사상이었고 바야흐로 집강소가 설치, 운영됨으로서 동학은 혁명의 교두보이자 원천을 확보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전라감영 관할 대부분의 군, 현, 면, 리에 집강소가 세워졌고, 치안 관리, 탐관오리 징벌 등 실질적인 개혁을 집행하게 된다. 민초들이 직접 행정·경찰·군사력을 행사했으니 그 권한은 실로 막강했다. 농민군과의 화약과 집강소 정치에 큰 도움이 되었던 김학진은 자신의 집무실인 선화당을 전봉준에게 내주고 자신은 징청각이라는 조그마한 방 한 칸을 차지했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전라감영의 모든 권력은 전봉준에게서 나왔다. 

  이 시기에 전라도 농민군은 크게 3개 지역으로 갈라져 있었는데, 전봉준은 수천 명의 동학교도를 거느리고 금구·원평을 중심으로 전라우도를, 김개남은 남원을 근거지로 하여 전라좌도를, 손화중은 광주 일대를 관할했다.

          먹구름이 몰려오다

  여기서 잠시 전봉준과 더불어 농민군의 지도자가 된 두 인물, 김개남과 손화중을 일별하고 넘어가자. 본명이 김기범인 그는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는 뜻으로 개남으로 개명하였는데, 전쟁 기간 내내 가장 비타협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여, 지금까지도 전봉준과 달리 역사적 평가에서 비껴 나 있다.

기실 그가 관할했던 남원 일대에서 양반의 씨를 말리겠다며 성기를 잘라버리는 경우도 있었으니, 가장 과격했던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혁명 시기에 일어난 일을 평상시의 잣대로 볼 수는 없다. 비타협 폭력노선이 가장 올바를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아직도 어둠 속에 가려진 김개남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필요하다 할 것이다. 반면 손화중은 온건파에 속한 인물이었다.

물론 나중에는 강온파가 무색하게 함께 처형되는 동지들이지만, 전쟁 기간 동안 손화중은 가장 많은 포접을 거느렸고 양반과 이서배 중에도 그를 따르는 자가 많았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동아일보를 세운 김성수의 누이가 손화중의 첩으로 들어왔다고 하는데, 호남 갑부였던 그의 집안이 인연을 맺으려 했을 만큼 손화중은 백성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고 있었다. 도인 같은 풍모에 많은 전설적인 일화를 남긴 손화중에 대한 조명도 다시 있어야 할 것이다.   
 
  전주성이 점령되자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한심하게도, 자기의 백성이 ‘사납고 교활하여 다스리기 어렵다’고 하소연을 하고 있는 글을 보면 부끄러움도 모르는 봉건지배자들의 맨 얼굴이 보인다. 청나라 군대 수천 명이 조선에 들어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일본군도 사천 명이 인천과 부산을 통해 상륙했다. 그들의 목적은 조선에 친일 개화정권을 세우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완전무장을 하고 연일 서울 곳곳을 휩쓸고 다니며 사람들을 위협하며 궁성 앞에서 훈련을 하였다. 경복궁은 일본군에게 거의 포위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양력 7월 23일 자정, 일본군은 경복궁의 모든 문을 부수고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갔다. 일본군에 의한 쿠데타는 너무도 쉽게 성공하고 말았다. 국왕은 포로가 되었고 대원군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을 등에 업고 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일 뿐인, 일본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자리였다.

  한편,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의 전장으로 변했다. 승승장구한 일본은 9월 평양전투에서 승리함으로서 완벽하게 승리를 거머쥐었다. 수백 년 동안 조선을 속국처럼 지배하던 중국이 물러가고 그 자리를 일본이 대신하게 된 것이었다. 바야흐로 일본의 조선 점령이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어찌할거나. 일본의 침략을 두 눈을 뜨고 지켜볼 수는 없었다. 다시 일어나야 했다. 봉건왕조가 아닌, 일본 제국주의와의 한 판 싸움은 피할 수 없었다. 제 2차 농민전쟁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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