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군, 전주성을 점령하다

동학농민혁명 5

  • 입력 2014.03.09 19:46
  • 수정 2014.03.10 19:42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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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치고 싶었다.
          4월이 오면
          산천은 껍질을 찢고
          속잎은 돋아나는데,
          4월이 오면         
          내 가슴에도 속잎은 돋아나고 있는데
                             (신동엽 시 ‘4월은 갈아엎는 달’ 중)

 

전주는 호남의 최대 관문이면서 왕조가 일어난 발상지라 하여 조정에서 특별히 관리하는 곳이었다. 전주성 남쪽 문인 풍납문 옆 경기전에는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모셔져 있었다. 또한 전국 제일의 곡창인 호남 들녘을 관장하는 자리인지라 탐관오리들이 눈독을 들이는 곳이기도 했다.  

  황룡강 전투에서 승리한 농민군은 곧바로 칼끝을 전주로 겨누었다. 4월 27일 새벽, 농민군은 전주성이 내려다보이는 용두치에 일자진을 치고 진격을 준비하였다. 이미 전날, 고종의 회유문을 들고 온 선전관 이효응과 배은환의 목을 친 농민군은 비장한 결의에 가득 차 있었다. 임금이 들려 보낸 표신과 통부를 시체 위에 내던진 그들에게 남은 것은 승리 아니면 죽음뿐이었다.
 
            밀고 밀리는 싸움   
    
 4월 26일 정읍과 태인을 거쳐 농민군은 다시 원평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전봉준과 김개남, 김덕명들의 앞마당이자 농민군의 근거지였다. 원평에서 농민군은 다시 고종이 하사한 내탕금 일만 냥을 관군에게 전하기 위해 왔다가 사로잡힌 선전관 이주호를 장터에서 참수하였다. 전봉준의 평소 행적이나 군령으로 보아 이례적일 만큼 결연한 일이었다. 기록에 이르기를, 서울에서 내려온 경군을 격파하고 나서 왕조를 가벼이 보았다고 하거니와 과연 썩어빠진 왕조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한 농민군의 기세는 매서웠다.

  전주성 점령은 오히려 싱겁게 이루어졌다. 다음날 전주에 모습을 드러낸 농민군은 그 숫자가 삼만여 명을 헤아렸다. 마침 장날이었다. 농민군은 장꾼으로 위장하여 장터로 스며들었다. 평소보다 훨씬 늘어난 장꾼들이 북적이던 오시 무렵, 커다란 포성이 용머리고개에서 연거푸 터지기 시작했다. 농민군이 쏜 대포였다.

포 소리에 놀란 장꾼들이 정신없이 서문과 남문으로 밀고 들어갔고 농민군들 역시 그들과 함께 성안으로 들어가 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농민군이 공격해오자 전주성을 지키던 군졸들은 겨우 대포 한 발을 쏘고 나서 도망쳐 버렸다. 전라감사 김문현조차 황급히 평민의 옷으로 갈아입고 제 목숨을 구걸해야 했다. 

  이렇게 삽시간에 전주성을 점령할 수 있던 것은 안에 있던 관속배들이 농민군에 호응했기 때문이라는 기록도 있으나, 자신들의 패배를 변명하려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다. 물론 말단 이서배 중에는 동학군에 호응하는 자가 상당수 존재하기도 했다. 하여튼 전봉준은 말에 높이 앉아 전라감사의 집무실인 선화당에 올랐다. 마침내 전주성을 점령한 농민군의 감격이 하늘을 찌를 만도 한데, 농민군은 더욱 규율을 엄격히 하여 관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농민군이 오히려 성을 차지하고 관군이 성을 공격하는 모양새가 된 것이다.

  다음날, 농민군의 꽁무니만 따라다니던 홍계훈은 전주성이 떨어지고 나서야 전주성 외곽 완산에 이르렀다. 전주성 함락은 그에게는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그는 이천여 병사를 성 주위 산과 성문에 배치하여 농민군의 연락과 탈출을 막으려 했다. 농민군이 전열을 정비하고 곧바로 서울로 진격한다면 역사상 최초로 민중혁명이 성공할 판이었다. 어떡하든 농민군을 전주성에 가두어놓지 못하면 자기 목이 떨어지는 것은 불 보듯 빤한 일이었다. 

  이로부터 수일간 성 밖으로 나온 농민군과 성을 에워싼 관군 사이에 밀고 밀리는 싸움이 벌어졌다. 농민군의 전술은 지형에 불리했다. 높은 곳을 차지한 관군을 향해 밀고 올라가는 싸움에서 장태는 큰 역할을 할 수 없었다. 농민군의 사상자가 더 많이 나오는 전투가 서너 차례 이어졌다.
 
          화약을 맺다 

  홍계훈은 전봉준을 잡아오는 자는 큰 상을 내리겠다는 따위의 효유문을 성안으로 유포시켰고 몇 차례의 전투에서 관군의 화력에 겁을 먹은 농민군 일부가 동요하기도 했다. 사실 두 세력 간의 전투력은 비교할 수조차 없는 지경이었다.

  지리적으로 우세한 곳에 자리 잡은 관군은 수입한 최첨단 소총인 스나이더, 모젤, 마르티니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당시 세계 최고 성능을 자랑하던 이들 소총은 정확하게 조준 사격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농민군은 고작 화승총과 창칼이 다수였고 죽창도 없어서 몽둥이를 든 이들까지 있었다. 화승총은 한 발을 쏘고 나서 다음 발을 장전하려면 십 분 가까이 걸렸고 그나마 비가 오거나 습한 날에는 무용지물이었다. 총을 든 이의 전투력이 딱히 죽창보다 높다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완산에 진주한 관군 본영을 뚫기 위해 농민군들은 앞뒤는 볼 수 없고 좌우만 볼 수 있는 일자진을 치고 전진하는 게 고육지책의 전술이었다. 누가 총에 맞아 쓰러지는지 보지 않고 오직 앞만 보고 달려가게 한 것이었으니, 용맹은 하늘을 찌를지라도 몸을 꿰뚫는 총탄이야 어찌 당하랴. 궁을이라고 쓴 부적을 붙이면 총알이 피해간다는 믿음으로 앞서 달리던 소년장사 이복용과 지휘자 김순명이 목숨을 잃었으나, 끝내 본진을 돌파할 수 없었다. 이 전투에서 농민군 오백여 명이 사상하고 마침내 전주성으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봉준 또한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농민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전주성 점령은 전주성에 갇힌 꼴이 되고 말았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그토록 고대하던 호서 농민군의 호응은 없었다. 그들 또한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주성으로 달려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최시형의 북접은 이미 황룡강 전투를 보고 남접을 과격한 세력으로 여겨 호응하지 않았다. 게다가 십여 일이 지나며 성안의 식량도 떨어져가고 있었다.

  내부의 동요도 컸다. 몰래 빠져나오면 체포하지 않겠다는 관군의 선전에 수십 명씩 무리 지어 성에서 나가는 농민군이 속출했다. 심지어 전봉준을 잡아 관군에 투항하려는 움직임조차 있었다. 이 무렵 조정에서 요청한 청군이 곧 도착할 것이라는 첩보도 들어왔고 실제로 사실이었다. 전투에서 승리한 홍계훈은 느긋해져서 청군의 상륙을 미루어달라는 전보를 보내기도 했다. 농민군으로서는 실로 진퇴양란에 처한 것이었다.
  지도부는 결단을 내렸다. 군대를 해산할 용의가 있으니 농민군이 요구하는 폐정개혁안을 임금에게 보내고 선처를 약속해달라는 요구를 하기로 했다. 농민군들이 내건 요구사항은 국가제도가 잘못되어 생긴 각종 비정과 벼슬아치들의 부정과 수탈 등과 보부상의 폐단과 쌀의 유출을 금해 달라는 것들이었다. 폐정개혁안은 27개 조항에 달했다.

  새로 부임한 신임감사 김학진과 홍계훈은 전투에서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지만 농민군과의 화약을 거부할 수도 없었다. 그들에게도 속내는 복잡하였다. 무엇보다 청나라와 일본이 연이어 국내에 상륙하였던 터라 빨리 농민군을 해산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자신들이 청한 원병이 자신들의 목을 겨누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었다. 다급한 조정에서는 농민군을 해산시키라고 연일 독촉이었다. 홍계훈은 이미 화약이 맺어져 농민군이 떠난 전주성에 마치 전투라도 치르는 것처럼 대열을 갖추어 입성하였다. 

 농민군과 조정이 비교적 쉽게 화약을 맺고 농민군이 전주성을 비워준 데는 양쪽의 그런 사정이 깔려 있었다. 차라리 전주성을 점령하지 않고 서울로 진격했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고 아쉬워하는 사람도 있다. 결과야 어찌되었을지 몰라도 농민군은 전주성 점령이라는 역사의 한 장을 남겼다. 그것은 이후 벌어질 근현대사를 통틀어 가장 빛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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