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은 아니지만 제주당근 최고다

  • 입력 2014.02.16 19:33
  • 기자명 고은정 약선식생활연구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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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랬다. 그녀는 언제 어느 자리에서든 눈에 잘 뜨이지 않게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앉아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고는 했다. 외모가 너무 평범해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 키도 작고 얼굴도 동글동글하고 어디 하나 예쁜 구석이 없어 여자아이들의 질투심을 자극하기에는 뭐 하나 돋보이는 것이 없는 정말 너무 평범한 아이였기 때문에 모두들 그녀를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고 심지어는 가끔 무시하는 것 같은 말투로 이야기를 건네기도 했다.

그래도 그녀는 별 불만 없이 그렇게 우리들과의 관계를 이어가고 있었고, 세월이 흐르고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무심해졌지만 오직 한 사람 그녀하고의 관계만은 달랐다. 다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아주 특별해져서 자주 연락을 할 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하소연을 할 수 있는 자신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화려한 외모에 출중한 언변으로 좌중을 압도하고 시선을 끌지만 어쩐지 자주 만나고 오래 만나지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어찌 보면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특별함이 전혀 없어 너무 밍밍하지만 오래도록 질리지 않고 자주 찾게 되는 사람이 보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음식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음식 뿐 아니라 음식을 이루는 식재료 하나하나가 어쩌면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우리 인간 한 사람 한 사람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늘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재료가 있는가 하면 눈에 보이지도 않고 입에서 그 특유의 맛이 잘 느껴지지 않는 재료가 있기도 하다.

그렇다고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재료만 가지고는 제대로 된 맛이 나지 않으니 돼지고기를 구울 때만 하더라도 최소한 후추나 소금은 있어야 돼지고기의 제 맛이 나니 말이다. 주연 배우 뒤에는 조연도 있고 지나가는 행인 1이나 행인 2도 있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내 친구 그녀가 그랬듯 당근이 꼭 그렇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게 있어 당근은 한 번도 주연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평생 조연의 식재료임에 틀림없다. 당근으로 국을 끓여 본 적도 없고, 당근이름을 단 나물을 해놓은 적이나 여타의 당근음식을 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렇다고 당근을 홀대하는 것은 아니어서 우리 집의 냉장고에 당근이 떨어지는 날은 없다.

당근은 지용성 비타민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서 기름기 있는 재료와 함께 익히는 조리를 해서 먹어야 본전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러니 당근을 갈비찜이나 닭볶음탕 등에 자주 이용하게 되는데 굵직하게 썰어 넣으면 참 애매하여 조리하기 힘들다. 속까지 익히려면 겉이 물러져 크기가 줄어들고, 모양새가 잘 잡히면 속이 덜 익어 서걱거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갈비탕이나 닭볶음탕 보다는 돼지고기와 함께 볶는 것을 좋아한다. 돼지고기 두께와 맞춰 썰면 익으면서 다 부서지고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뿐 아니라 음식의 모양도 썩 보기 좋지 않으므로 이때 당근은 낭창낭창하게 써는 기술이 필요하다. 잘 씻은 당근을 반으로 잘라 엎어놓고 사선으로 어슷하게 썰되 아주 얇게 썰어 부러지지 않고 구부러지게 써는 얕은 기술쯤이야 살림하는 주부라면 누구나 가능한 것이기는 하니 자랑할 만한 것은 못 된다.

말끔하니 목욕단장 하고 나와 있는 당근뿐이던 시장에 검은 흙을 뒤집어쓰고 수줍게 얼굴을 내미는 제주당근이 나왔다. 제주산 돼지고기 한 근 사다 고추장과 함께 볶는다. 오늘도 여전히 당근은 조연에 불과하지만 돼지고기와 고추장, 당근이 이루는 조화가 절묘하다.

맛도 좋은데 더불어 항암효과도 있고 해독작용도 있으며 눈도 밝게 하고 소화기도 튼튼하게 한다니 이런 걸 보고 금상첨화라고 하나보다. 제주당근 참 달고 맛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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