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마을 40회

  • 입력 2013.12.22 19:45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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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이 들려준 말에 따르면 정선택이 두어 달 전부터 심각한 치매 증상을 보인다는 거였다. 준석도 정선택이 조금 이상하다고 느끼긴 했지만 여든이 가까운 나이다 보니 으레 총기가 떨어져서 그런가보다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거였다.

“재길이 말로는 집 밖 출입도 어려운 지경이래요. 남들한테 쉬쉬 해서 그렇지, 지들 식구들끼리는 요양원까지 알아본 모양이더라고요. 뭐, 재산도 있고 자식들도 잘 사니까, 고급 요양원으로 가면 그게 나을 텐데, 재길이 엄마가 반대를 한대요. 아무래도 남들 눈이 있으니까 그렇겠지요.”

정용이 가고난 후 준석은 정선택의 집에 가보기로 했다. 치매가 병 중에 고약한 병이고 마을 안에서도 모를 정도로 숨기는 심정도 모르지 않지만, 모르면 몰라도 알고 나서도 마냥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한편으로는 진짜 정선택이 치매가 맞는지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산그늘이 깊은 곳으로는 아직 눈이 쌓여 있고 정선택의 집 뒷산에도 군데군데 잔설이 남아있었다. 거의 아름드리가 되는 굴참나무 백여 그루와 역시 고목이 된 밤나무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그 산은 정씨네 문중산이면서 경사가 적당하고 잡목이 없어 어린 시절의 놀이터였다. 다만 가을에는 산에 들어가는 게 금지였다. 참나무에서 떨어지는 굴밤과 밤을 주워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어쩌다 아이들이나 물정 모르는 다른 동네 사람이 산에 들어서면 마치 새를 쫓듯이 훠어이, 훠어이 소리를 쳐 쫓곤 했다. 그런데 그렇게 소리를 치고 팔을 내젓는 이가 다름 아닌 준석의 아버지 필성이었다. 정선택의 행랑살이를 끝내고 나서도 아버지는 마름 구실을 했다. 식구들 목구멍에 풀칠할 수 있을 정도로 제 땅을 마련한 뒤까지도 필성은 그 노릇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정선택보다 네 살이나 많던 아버지는 언제나 정선택을 두려워했다. 준석이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아직 행랑살이를 할 때, 정선택 집의 널따란 바깥마당에 있던 늙은 버드나무 아래에서 아버지가 매를 맞던 광경은 준석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아버지는 땅 위를 이리저리 구르며 정선택이 내리치는 몽둥이를 그대로 맞고 있었다. 멀리서 눈물을 흘리면서도 끝내 아버지에게 달려가지 못하고 오히려 뒤로 돌아 도망친 그 날 이후 정선택은 원한의 대상이면서도 어찌해볼 수 없는 거대한 벽이었다. 그만큼 마을은 정씨들의 장원 같은 분위기였다. 지금은 완전히 망하다시피 영락했고 마지막으로 마을에 남아있는 정선택마저 치매가 들었다고 하니 알 수 없는 감회가 일어났다. 면도 아니고 군(郡)을 넘어서 전국적인 인물이라는 말까지 들었던 정선택도 결국 이렇게 인생이 저무는 것이었다.

“계셔유?”

준석은 마당을 들어서 봉당으로 올라서며 인기척을 냈다. 아무도 없는 듯이 한동안 조용하더니 문이 열리고 정선택의 부인인 평촌댁이 모습을 보였다.

“영주 아부지가 어쩐 일이래요? 좀 올라오시지.”

“요즘 통 회관에도 안 오시고 해서 궁금해 들렀시유. 저장해 뒀던 사과가 좀 남았길래 가지고 왔어요. 저온저장고가 아니라 좀 쭈글쭈글한데 맛은 그냥저냥 드실 만 할 거유.”

“지난 슬에 준 것도 남었는데, 두 늙은이가 뭔 사과를 그리 먹는다구.”

그때였다. 여며두었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정선택이 무릎걸음을 걸으며 마루로 나왔다.

“누가 왔어?”

준석은 조금 놀랐다. 집에서도 늘 깨끗하게 차려입고 기름 바른 것처럼 머리를 빗어 넘긴 정선택의 모습이 아니었다. 마치 다른 사람처럼 추레한 몰골이었다. 이미 사신이 드리웠다고나 할까, 한 눈에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예, 으르신 뵈러 왔습니다요. 별고 없으시지요?”

준석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차렸다. 정선택은 인사를 받는 기색도 없이 준석을 빤히 노려보았다. 민망할 정도로 바라보는 시간이 한참이더니 뜻밖의 말이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필성이 자네, 그렇잖어두 내가 헐 말이 있어 부를랴구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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