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마을 37회

  • 입력 2013.11.30 02:29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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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말에 준석 역시 퍼뜩 생각이 거기에 미치게 된 것이었다. 아무래도 사다가 쓰는 석회유황합제는 집에서 만든 것보다 냄새도 덜 독한 것 같고, 제대로 만든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과수원을 하면서 하도 여러 번 속다보니 그런 의심이 솔솔 피어올랐다.

특히 묘목과 영양제에는 수도 없이 사기 비슷한 것을 당했다. 새로 나온 품종이라며, 다시없을 기가 막힌 사과가 달릴 것이라는 묘목상의 달콤한 말에 넘어가서 심었다가 실패를 본 적이 여러 차례였다. 당도와 색깔을 획기적으로 높여준다는 영양제를 들고 오는 자들도 숱했다. 한편으로는 의심을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비싼 값에 구입해 써보면 역시나 별무신통이었다. 그런 자들은 한두 해만에 연락조차 되지 않고 잠적하기 일쑤였다. 아마 전국적으로 그런 피해를 입히고 사라지는 전문 사기꾼 집단이 있는 듯했다.

그래서 올해는 집에서 황을 고기로 했고, 혼자 하면 버거운 일이라 작목반에서 특히 준석을 따르는 박정용이와 함께 하기로 했던 것이었다. 원래는 아내와 둘이 해볼 요량이었는데 유황과 생석회를 사기 위해 들른 산동농약사에서 우연히 만난 박정용이가 그 자리에서 그렇게 나왔던 것이다. 그래서 제 몫의 유황과 석회를 사서 준석의 차에 실었다.

“형님이 하면 저도 같이 혀요. 오랜만에 형수님께 인사도 드리고.”

나이로는 여덟 살이나 아래여서 작목반이 아니면 특별히 가깝게 지낼 처지가 아니었지만 성격이 싹싹하고 농사도 아금받게 짓는 후배라 준석 역시 남다르게 대하는 터였다. 그가 작목반 총무를 맡고 있어 소소하게 부탁을 하거나 연락을 할 일도 잦은 편이었다.

작년에도 작목반 앞으로 나온 저온저장고를 남보다 먼저 준석에게 권하기도 했다. 천만 원이 넘게 드는 저온저장고는 면내에서 사과 농사를 하는 사람 중에 주로 젊은 축에서 많이들 갖추고 있었다. 한꺼번에 많이 나와서 값이 없을 때 저온저장고에 넣었다가 시세를 봐가며 내기 위해서였다.

습도와 온도를 자동으로 조절하는 저온저장고에 사과를 넣어두면 일 년 정도까지 너끈하게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게 좋은 줄은 알지만 짓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커서 나이든 농민들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한 해에 한두 개씩 정부 지원이 나왔다. 전부는 아니고 짓는 비용의 절반이 무상보조이고 나머지는 자부담이었다.

작목반원들이 오십 명이 넘고 정부에서 반을 보조해주니까 원하는 사람이 여럿인데, 박정용이는 어떡해서든 준석에게 해주려고 했다. 하지만 역시 준석에게도 자부담이 문제였다. 이미 일억이 찬 빚을 더 늘릴 수는 없었다.

“야, 나는 그냥 있는 저장고나 쓰다가 말란다. 언제까지 농사를 지을지도 모르는 판에 새로 돈 들여서 그렇게 허겄냐. 누구 젊은 사람들한테 밀어줘.”

준석은 벌써 이십 오년 전에 집 뒤의 산을 굴처럼 파고 부목을 댄 저장고가 있었다. 온도나 습도 조절을 자연 그대로에 맡기는 천연 저장고인 셈인데 거기에 넣어두어도 두어 달은 저장이 되었다. 그러니까 십일월 초순에 따서 다음 해 설에 내는 부사를 저장하는 데 쓰이는 용도였고 그 저장고를 팔 때만 해도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무슨 말씀이세요, 형님? 형님 연세가 아직 청춘인데. 앞으로 이십년은 더 농사지으실 거 아녀요? 저온저장고 있으면 정말 좋아요. 농업용 전기로 쓰니까 전기세도 싸고 김장해서 넣으면 맛 좋고. 이번 기회에 하셔요. 어째 정부에서 하는 꼴 보니께 내년부텀은 이런 지원도 끊길 거 같아요.”

남의 속도 모르고 권하는 그에게 준석이 속내를 조금 비쳤다.

“이 사람아, 내 나이도 적은 게 아녀. 몸도 한 해가 다르게 삭아내리는 거 같다니까. 글고 인제 진 빚을 줄여가야 할 판에 더 빚을 질 수는 없잖어. 사과 농사두 중국하고 에프티에인가 뭔가 하게 되믄 절딴날 수도 있는 거고. 앞날이 캄캄한 판에 무슨 투자를 자꾸 하겠어?”

“글쎄 말입니다. 정부에서는 예외품목인가 뭔가로 한다지만 당최 믿을 수가 있어야지요. 어디 그렇게 속은 게 한두 번인가요? 젊은 사람들도 만나면 그 얘길 해요. 우리나라에서 중국으로 건너간 사과 묘목만 해마다 수십만 주라고 하는데, 그게 다 우리를 겨냥하는 거라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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