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마을 21 회

최용탁 장편소설 '들녘'

  • 입력 2013.08.02 13:44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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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파에 누워 설핏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 보니 아직 자정 전이었다. 잠결에 영주가 칭얼대는 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다. 아내는 영주의 방에서 잠들어 있었다. 준석은 한기가 느껴져 방으로 가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등을 댄 바닥이 서늘했다.

연탄보일러는 불이 셀 때가 있고 약할 때가 있는데, 새벽녘에 따뜻하려면 하루에 두 번은 갈아주어야 한다. 불구멍도 조금은 열어두어야 그나마 온기가 도는데, 두 번씩 갈아대는 것도 귀찮을뿐더러 연탄 값도 만만찮아서 늘 불구멍을 막고 지내다보니, 때로는 방바닥이 등 덕을 보자고 할 판이었다. 

  준석은 바닥에 깔려있는 전기장판에 제일 약하게 스위치를 켜고 따뜻해지기를 기다렸다. 담배 한 대 생각이 간절했지만 창문을 열었다가는 살을 에는 바람이 들어올 터여서 눌러 참는 수밖에 없었다. 올해는 전과 달리 겨울이 길게만 느껴졌다. 태성이네로 마을을 다니는 것도 왠지 흥이 나지 않고 만사가 귀찮은 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몸은 고달플지라도 농사철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노는 것두 지겹구만. 얼른 일철이나 됐으면 차라리 좋것네.”
  며칠 전에 지나가는 투로 말했더니 아내가 웃으며
  “당신이 인제서야 농사꾼이 되었나비네유. 예전에는 겨울 한 철 노는 맛에 농사 짓는다구 하더니 안즉 설두 지나지 않어서 노는 게 지겹다니 말유. 철나자 노망이라드니 일찍두 철이 나셨네, 호호.”
 하고 새살을 떨었다.

  “허허, 보자보자 하니 못허는 말이 읎네. 어디 으른헌테 철이 났느니 쇠가 났느니 허는 거여?”
  “호호. 퍽두 으른이겄네. 사실 생일루 치믄 넉달 차이 아뉴?”

  늦게 철이 났다는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돈이 안 되는 농사인 줄도 알고 마음속으로는 땅값이 올라서 목돈을 쥐면 시내에 나가서 살고픈 마음도 있지만 별 일이 없어도 발길이 자꾸 밭으로 향하곤 했다. 과수원을 둘러보며 실없이 나무를 어루만지기도 하고 걸터앉아서 지난 가을에 과일을 수확하던 때를 떠올리기도 하며 두어 시간을 보내기가 일쑤였다. 친구들을 만나 떠들며 노는 시간보다 혼자 과수원을 산책하듯 돌아다니는 게 더 마음이 편했다. 

  ‘설 전이라도 전지를 시작해야 겠어.’
  그렇게 마음먹은 것도 올해가 처음이었다. 춥기도 추우려니와 음력 설 전에는 일을 하면 큰일이나 나는 것처럼 여겨 마을을 다니는 것을 일로 삼았는데 올해는 몸이 근질거리는 것처럼 얼른 과수원에 나가 일을 하고 싶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며칠이 지나 준석은 사과나무 전정을 시작했다. 복숭아나무는 너무 일찍 가지를 잘라주면 동해를 입을 염려가 있지만 사과나무는 일찍 해주어도 상관이 없었다. 원예조합에서 조합원에게 해마다 선물로 주는 새 전정가위와 톱을 챙겨들고 준석은 과수원으로 향했다. 집에서 오백 미터쯤 떨어진 과수원에는 여전히 눈이 쌓여 있고 날이 풀렸다고는 하지만 한낮 기온이 아직 영상과 영하를 오락가락하는 정도였다. 

  “눈 위에다 사다리 놓다가 미끄러지기라두 허믄 누구 속을 썩일라구 올해는 이리 서두르는 거유?”
  집을 나서는 준석을 아내가 말렸지만 준석은 내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두어 나무라두 일찍 줄여놓으믄 나중에 공짜같잖어. 집에서 노느니 밭에서 논다구 생각허면 되지. 즘심에 감자 썰어 넣구 수제비나 해먹자구, 뜨듯허게.”

  심은 지 구년에 접어든 홍로와 십삼 년째인 부사 모두 한창 수확을 보는 나무들이었다. 밀식재배라고는 하지만 한창 클 대로 큰 나무들이라 보통 삼 미터가 넘었다. 나무에는 아직도 마른 잎들이 매달려 있었다. 다른 나무들이 겨울이 오면 일제히 잎을 떨어뜨리는 것과 달리 사과나무는 마른 잎들이 달려 있는 경우가 많다. 잘라야 할 가지를 잘라주며 매달린 마른 잎들까지 알뜰하게 떼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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