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마을 17회

최용탁 장편소설 '들녘'

  • 입력 2013.06.28 12:18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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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값만 다락같이 올라가믄 팔 마음이야 있지. 암만 농사 지어봐야 돈두 안 되고, 해마다 가슴 졸이다가 속병되는 기 농산데, 누군들 짓구 싶어서 짓나? 누가 한 십억 준다믄 팔구 말지, 뭐.” 경태가 묻는 말에 농담처럼 대꾸하면서 속이 뜨끔하기는 했다.

한때는 농촌을 살려야 나라가 산다고 제법 열을 내어 주장을 하던 자신이 그런 말을 입에 올린다는 게 스스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몇 년 전, 고작 다섯 명이던 농민회 면 지회에서 두 명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면서 지회가 흐지부지 되었고 결국 준석은 농민회 활동을 접고 말았다. 아주 적극적인 회원은 아니었어도 십여 년 가까이 해왔던 농민회였다. 정도 들었고 그간의 안면을 보아서도 발길을 끊을 일은 아니었는데, 왠지 꿈쩍도 하지 않는 벽에다 조약돌이나 던지는 것 같은 기분이 자꾸만 들어서 시나브로 나가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농사나 짓고 살자는 심정이었는데, 농사란 게 늘 그렇듯이 마음 편한 게 아니었다. 몇 해 동안 빚이 일억이 넘는 액수로 불어났다. 농사만으로 치면 아주 적자가 날 정도는 아니었지만, 여섯 해 전에 집을 새로 짓느라고 받은 대출금이며 트랙터를 사느라 받은 돈에 장기 저리라고 쓴 경영자금 따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무려 일억이 넘어버린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저녁에 잠자리에 누웠다가도 평생 빚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허덕일 것 같은 두려움에 벌떡 일어나 담배 한두 대를 끄곤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 노릇은커녕 죽을 때까지 품안에 두고 돌봐야 할 딸 영주는 말할 것도 없고 대학 일학년을 간신히 마친 채 군대에 간 아들 영호도 앞날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이름 없는 지방 대학의 경영학과를 졸업한다한들, 제 한 몸 건사하고 가정을 이루어 살게 될 가능성이 별로 없는 세상이 아닌가 말이다. 부모가 되어 둘뿐인 자식들에게 기반은 고사하고 자칫하면 빚을 대물림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준석은 농사를 짓는 자신의 삶이 점점 고달프게 느껴졌다.

농사 말고 다른 일은 생각해 본 적이 없고 할 자신도 없으면서도, 정말 땅값이 올라서 목돈이 된다면 농사를 접고 싶었다. 시내에 월세 나오는 건물을 한 채 살 돈 정도만 되면 평생 살아온 고향일지언정 미련 없이 뜰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고속도로에 과수원이 편입되어 보상을 받은 이웃 마을의 후배 하나는 시내에 삼 층짜리 건물을 사서 삼층을 살림집으로 쓰면서도 한 달에 백오십인가가 월세로 들어온다고 했다. 그러면서 저는 슬슬 일용직이나 다니는데 일이 꽤 많아서 그 수입도 오히려 농사짓는 것보다 낫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내심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당장이라도 땅을 팔고 싶었다.

하지만 말만 무성했지 실제로 땅이 매매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남들 눈이 있어서 부동산에 땅을 내놓기도 어려웠다. 좁은 동네라 금방 소문이 돌 것이고 아직 그런 소문을 감당하기에는 준석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저 혼자 속마음일 뿐이었다. 그런데 경태가 대뜸 그렇게 물어오자, 속내 한 귀퉁이가 저도 모르게 비어져 나온 것이었다.

“출출한데 어디 저녁이나 먹으러 가지. 은실이네 묵밥 먹으러 갈까?” 어느 새 밖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깟 묵밥을 뭔 맛으루 먹는다냐? 차라리 순대국밥이 낫지. 그러구보니께 은실이네 생각이 나서 그러는 게로구만. 아서라, 은실이 엉덩이에 눈독들이다가 제수씨한테 경치지 말구.”

“지랄허네. 도둑이 지 발 저린다고, 혼자서두 은실이네 드나드는 게 누군데. 너 메칠 전에 은실이네 구석텡이에서 혼자 소주병을 대낮에 까는 걸 내가 봤는데, 들어가려다가 은실이허고 뭔 수작을 하는 것 같아서 그냥 지나갔던 거 모르지?”

“먼 소리여? 벌써 나잇살이나 먹었다구 헛 걸 보구 댕기는 거 아녀?”

방앗간 하는 남영이와 고구마 농사짓는 기홍이가 겨끔내기로 떠들고 있었다. 기홍이의 대거리가 어딘지 숙지는 걸로 봐서 혼자 은실이네서 술을 먹은 게 맞긴 맞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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