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마을 15회

최용탁 장편소설 '들 녘'

  • 입력 2013.06.16 22:40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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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면 면소재지 곳곳에서 화투판, 카드판이 벌어진다. 소재지에는 열 개가 넘는 식당과 세 개의 다방, 호프집 두 곳이 있다. 일 년 사이에 식당이 다섯 군데나 늘어난 것은 갑자기 산동면에 여러 큰 공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장지산 한 편을 밀어 골프장 공사가 한창이었고 평택에서 삼척까지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닦는데 산동면에 인터체인지가 서게 되어 한적하던 동네가 온통 공사판으로 흥성거리게 되었던 것이다. 식당이라고 해봐야 제 농사지으면서 푼돈이나 뜯어 써볼까 하고 간판은 걸었으되 메뉴라고는 흔해빠진 염소탕이나 삼겹살, 순대국밥 따위였다. 그러던 것이 외지인들이 꼬이면서 식당이 농사보다 더 쏠쏠하게 되자, 갑자기 대여섯 개의 식당이 더 생겨난 것이었다. 심지어 돈가스 전문 식당까지 생겨나 시골 노인들이 포크에 칼을 들고 점심을 먹는 광경이 펼쳐지곤 했다.

그런 식당들이 겨울이면 방 한 칸을 화투판으로 내주어 긴긴 겨울이 따분하기 이를 데 없는 농민들이 끼리끼리 모개를 지어 판을 벌이는 것이었다. 대개는 종일 잃어도 일, 이만 원을 넘지 않는 심심풀이였지만 때로는 판이 커져서 얼굴을 붉히고 멱살잡이를 하는 소동도 간간이 일어났다.

장난이 아닌 진짜 도박이 벌어지는 곳은 이발소와 당구장이었다. 이발소는 본래 주인인 이종배가 머리 깎는 것보다 화투에 더 소질이 있어 아예 안쪽에 방을 들이고 겨울이면 밤낮으로 판을 벌였다. 이발소에 모이는 치들은 주로 나이가 지긋한 축이었다. 젊어서부터 화투라면 사족을 못 쓰던 이들이 새마을운동과 도박 단속에 밀려 아쉬운 손을 놓았다가 언제부턴가 예전의 꾼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늘그막에 다시 맛본 도박에 들려 영농자금을 날려먹는 자도 나오고, 아내가 경찰에 신고하여 몽땅 경찰서로 연행되는 사태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그래도 시골 마을에서 벌어진 일이라 별 탈 없이 넘어갔고 여전히 이발소 뒷방에는 너구리라도 잡는 듯 담배 연기가 굴뚝 연기처럼 피어나며 화투짝이 부딪치고 있었다.

좀 젊은 사람들과 외지인들이 모여 주로 카드를 치는 당구장은 중국집을 하는 박해봉이가 이층에 새로 열었다. 도대체 시내에 있는 당구장도 파리를 날리는 판에 사람도 얼마 없는 시골에 당구장이 가당키나 하냐고 혀를 차던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네 개의 당구대는 노상 빈자리가 없을 만큼 활황이었다. 지금은 농촌에 틀어박혀 농사나 짓고 있지만 과거에는 당구장에서 짜장면깨나 시켜먹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고 싶은 듯, 의외로 당구장을 찾는 사람들은 많았다.

준석 역시 고등학교 때부터 큐대를 잡은 경력이 있어서 가끔 친구들과 점심 내기 당구를 치러 들르곤 했다. 그러다가 천생 농사만 지을 줄 아는 고라니인 줄 알았던 사과 작목반장이 연달아 쓰리쿠션을 돌리는 것을 보고 놀라기도 했다.

“왜 그려? 나 이래뵈두 인천 짠물에서 배운 이백 다마여.”

작목반장의 얘기를 들으며 준석은 또 한 번 사람 속은 요지경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가 객지 생활을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지 삼십 년이 다 되었다고 들었고 농사 말고는 아예 재주가 메주인 줄 알았는데 당구로 치면 면내의 일인자였다.

당구장 구석에는 박해봉이가 칸을 막아 아예 노름방을 하나 만들어두었다. 어떤 때는 세 팀이나 방을 점령하고 카드를 돌리기도 했는데, 동남아 출신으로 보이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카드를 돌리기도 했다. 박해봉이가 중국집이나 당구장 수입보다 노름판 뒷돈을 대주며 챙기는 돈이 쏠쏠하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하여튼 면내에 유행병처럼 도박이 성하게 된 것은 삼 년 전에 파출소가 이웃면과 통합되면서 사라진 게 한 이유였다. 아무리 얼굴 맞대고 이웃으로 지내는 파출소 순경이라도 대놓고 화투판을 벌이지는 못했는데, 파출소가 지구대로 바뀌면서 가끔 순찰차가 돌 뿐, 상주하는 경찰이 없어지자 거리낄 게 없었다. 그래도 겨울뿐 아니라 연중무휴로 화투판이 벌어지는 것은 요즘 보기 드문 일이었다.

“오늘은 출근이 늦었네. 한 판 낄려? 저녁에 묵밥이나 먹자고 치는 건데.”

다행히 태성중기에서는 도박이라 할만한 판은 벌어지지 않았다. 카드 패를 돌리던 재만이 자리를 당겨 앉으며 준석이 앉을 공간을 내주었다. 전기 패널이 깔린 바닥은 엉덩이가 뜨겁도록 잘잘 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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