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마을 14 회

최용탁 장편소설 '들녘'

  • 입력 2013.06.09 13:24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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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거 때마다 사람들이 모이는 건 보았지만,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강추위를 무릅쓰고 모여 있다는 게 준석은 믿기지 않았다. 줄잡아도 만 명은 훨씬 넘고 주최 측 추산이라면 오만 명이라고 과장을 해도 딱히 시비를 걸기 어려워 보였다. 

  다섯 시에 시작한다는 유세는 점점 늦어지더니 여섯 시가 넘도록 수만 명이 오매불망하는 후보는 도착하지 않았다. 준석은 시청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선 배가 고파서 뜨끈한 국밥이라도 한 그릇 먹고 싶었다. 마을 사람들은 허기도 잊은 듯 대형 트럭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와 악을 쓰듯 외치는 구호를 넋이 나가 듣고 있을 뿐이었다. 

  “퇴근했냐? 했으면 같이 밥이나 먹을까? 나 시내에 나와 있는데.”
  고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는 공무원으로 평생을 살았다. 산업계에 있을 때는 친구랍시고 이런저런 정보를 미리 챙겨주기도 했지만 그것을 딱히 득을 본 적은 없었다. 그는 주민등록 상 나이가 두 살이나 줄어서 아직 정년을 더 남겨두고 있는 과장이었다. 

  “나 지난주에 퇴직했어. 내가 늬한테 말 안했나? 허긴 나두 갑작스레 결정한 거라.”
  “퇴직이라니, 그 좋은 자리를 왜 미리 그만뒀어?”
  “그게 좀 그렇게 됐어. 전화로 얘기하기는 좀 그런데, 괜찮은 자리가 있어서 그리 들어가기로 한 거여. 글고 오늘은 내가 다른 손님들허고 약속이 있어서 어렵겠는데.”

  전화를 끊고 생각해보니 누군가에게 스치듯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공무원으로 퇴직할 때쯤이면 시와 관련이 있는 기업이나 공사 따위에 들어가서 또 편하게 직장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였다. 비록 친구이긴 하지만 씁쓸했다. 그렇게 저희끼리 울타리를 치고 서로서로 잇속과 자리를 차지하는 세상에 대체 농민은 어디에 들 수 있는 백성이란 말인가.

  춥고 배가 고파 점점 부아가 치밀던 일곱 시가 다 되어서야 빨간 점퍼에 빨간 목도리를 두른 후보가 나타났다. 도무지 하나마나한 달콤한 소리만 늘어놓는 연설인데도 그 앞에 모인 장삼이사들은 하늘의 복음이라도 들은 양 밤하늘 가득 환호성을 울렸다.

앞에서 줄을 맞추어 손뼉을 치고 구호를 외치는 젊은이들 외에 이삼십 대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두부 모 자르듯 나이를 잘라서 모아놓은 것 같았다. 물론 준석도 거기에 포함되는 나이였지만 아니라고 도리질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날 준석은 생전 처음으로 편의점이라는 곳 들어가 혼자 컵라면을 먹었다.
 
  “어차피 그냥 붙여 놓으나 액자에 넣어 거나 그게 그거니까, 여러분덜 의견이 그렇다면 그대루 따르겄습니다.”
  준석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매듭을 지을 밖에 도리가 없었다. 황당하고 창피한 일이었지만 정선택은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럼 오늘 대동계는 이걸루 마치기루 허구요, 아짐씨덜두 설거지 마치구 얼릉 자리루 오셔유. 해마두 허던 대루 단체 윷놀이에 상품은 농협에서 낸 요소 비료 이십 포에 설탕 열 포가 걸렸으니께, 잘들 노셔서 가져가세유.”

  양만득의 폐회와 함께 윷놀이 판이 펼쳐졌고 준석은 약속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트럭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겨울이면 매일 가다시피 하는 면소의 태성중기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곳은 역시 초등학교 동기인 한태성이의 사무실인데 친구들의 사랑방이기도 했다.

이십여 년 전부터 포클레인과 덤프 차 등속을 갖추고 기사도 써서 공사판이나 농사일을 가리지 않고 다니며 알토란처럼 돈을 모은 친구였다. 면내에서는 제일 현금이 많다는 소문이었다. 물론 면내의 곳곳에 자리 잡은 외지에서 들어온 진짜 기업들은 빼고서다. 

  “자자, 보자. 토끼풀 에이스는 빠졌구, 다이아두 읎을 테구. 오케이, 레이스.”
  “저거 순 뻥칸데. 이걸 가지구 죽어, 살어? 뻥카 잡으러 가볼까, 나두 콜.”
  사무실에서는 다섯이 둘러앉아 카드놀이가 한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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