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

  • 입력 2013.06.09 13:21
  • 기자명 한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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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를 한 자루 묻어두었더니 제법 튼튼한 싹이 수백개 올라왔다. 이제 본밭에 싹을 잘라 심어야 한다. 비가오지 않으니 물주며 심어야해 손이 많이 간다. 갑자기 뜨거워진 날씨에 죽지 않게 꼭꼭 눌러주며 땀을 흘린다.

당뇨병이 있는 필자는 당뇨에 좋다는 작물이 있으면 자연스레 관심을 갖게 되었다. 뚱딴지, 뽕나무오디, 달개비 등은 이미 항간에 소문이 자자한 당뇨를 치료하는 기능성작물이 되었다. 고구마 또한 배를 불리는데 그만이라 당뇨에 도움이 된다고 해 일부러 많이 심는다. 

해짧은 겨울날 점심대용으로 고구마를 먹었던 기억이 아련하다. 쪄서 먹고, 구워먹고, 긴긴밤에는 생으로 깍아 먹었다. 방안 윗목에는 고구마 동고리가 몇 개씩 있었다. 가난한집에 고구마 동고리는 보기만 해도 배부르다고 했다.

고구마가 처음 들어 온 때는 선조말엽이라고 한다. 그 후 300여년이 지난 1900년경에야 전국적 재배가 가능해졌다고 한다. 그야말로 300여 년 동안 눈물겨운 고구마재배의 역사가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두둑을 올리고 고구마 순을 땅에 꽂으면 쉽게 고구마를 캘 수 있지만 열대작물이 온대에 적응하기 전에는 여간 쉽지 않은 일 이었나보다.

처음 비변사가 나서서 고구마재배를 시도(인조11년)했지만 실패했다고 한다. 그후 현종4년에 대마도의 고구마재배를 눈여겨본 조선인들이 고구마재배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이광려라는 사람은 식량확보를 위해 고구마에 눈을 떳고 통신사였던 조엄에게 고구마 종자를 구해오도록 해 시험재배(1763년)에 들어갔으나 역시 실패했다. 그 후 동래부사 강필리에게 부탁해서 다시 시도했으나 또 실패하고 이광려는 끝내 고구마재배를 성공시키지 못했다.

이광려의 애민 정신에 감동받은 강필리는 동래에서 고구마재배를 시작해 1766년 성공하고 ‘감저보’라는 책을 펴냈다. 이후 전국적 재배확대에는 김장순, 선종한 등이 노력한 결과다. 이들은 서울에서 시험재배를 성공하고 ‘감저신보’라는 책을 발간(1811년)한다.

이후 서경창은 북부지방에서 시험재배에 들어갔고 파종시기와 재배방법을 과학적으로 정리한 ‘종저방’이란 고구마재배서적을 내놓기에 이른다. 그 다음을 이은 이가 서유구이다. 농촌진흥청 자리에 둔전을 두고 수차를 개발하는 등 농업백과사전인 임원경제를 지은이다. 서유구가 호남지방관찰사로 있을 때 고구마의 대대적 재배에 들어갔고 이때 모든 기술을 집성한 ‘종저보’를 지를 지어 전국의 고구마재배를 가응케 한 것이다.

지금은 한낮 간식거리에 불과한 고구마 한 작목에 이렇게 많은 시간과 사람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이 땅에 구황작물로 정착시킨 예는 없다.  이들은 하나같이 쉽게 배를 불릴 수 있고 수확량이 많은 고구마에 민중의 희망이 있음을 보고 수많은 난관을 헤쳐 마침내 성공시킨 것이다.

이런 고구마가 농민운동의 불씨를 지피기도 했다. 이제는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린 못생긴  ‘물고메’처럼 이 땅의 못난 농민들도 하나둘 사라져 간다. 어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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