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마을 8회

최용탁 장편소설 '들녘'

  • 입력 2013.04.21 16:34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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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단 공무원도 내려 보는 이장 자리일지언정 머리에 든 게 있고 관에 가서 말발이라도 세울 줄 아는 사람이라야 마을에도 득이 될 터이고 정선택으로 말하자면 누가 뭐래도 마을에서 제일 많이 배우고 면이 아닌 시에서도 함부로 보지 못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십여 년 전에, 정선택이 다시는 이장을 맡지 않겠노라는 선언과 함께 그 자리를 내려놓을 때까지 마을의 이장은 당연히 정선택으로 알고 살아온 세월이었다. 그 때도 이미 예순 중반이었던 정선택은 면내의 이장 중에 자신이 제일 나이가 많다며 이제 나다니기도 창피하다는 이유를 댔다. 그 얼마 전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트럭에 받혀 달포 넘게 병원에 입원했던 것도 이유였다.

  그런데 정선택의 뒤를 이어 이장이 된, 지금은 흙보탬이 된 최성대가 맡은 지 일 년을 못 채우고 그만두고 말았다. 그 역시 울뚝밸이 있달 뿐, 정선택의 말에는 늘 고분고분하던 자였는데 그 정선택에게 욕설을 퍼붓는 사태가 일어났다. 나중에 술 취한 그에게서 들은 말로는, 날마다 정선택이 찾아와 미주알고주알 따지고 트집을 잡으며 들볶아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 때만해도 정선택이 자기가 하던 것처럼 하지 못하니까 지청구를 해댄 것을 성깔이 있는 최성대가 맞받아친 정도로 이해하는 축들이 많았다. 그런데 다음번에도 그런 일이 똑같이 일어나고 남은 임기 동안 맡았던 양만득조차 내막은 말하지 않았지만 두 번 다시 하지 않겠다고 고개를 젓고 나서는 이장을 하겠다고 나서는 이가 없었다. 

 

그 무렵에는 누가 보아도 시곡에서 이장을 맡을 사람은 준석이었다. 나이도 그럭저럭 젊은 축이었고 다른 마을에서도 준석 또래들이 이장을 보는 경우가 많았다. 고등학교라도 나오고 인물이나 말발로나 남들에게 처지지 않는 준석이었다. 사실 면에서 은근히 준석을 어렵게 대한 것도 사실이었다. 

  지금은 회원인지 아닌지 저도 헷갈릴 만큼 어중뜨기가 되었지만 그 때만 해도 준석은 면에서 다섯 명 밖에 없던 농민회원이었다. 십 년 가까이 농민회 회원으로 있으면서 세상 돌아가는 속내나 농협 돌아가는 내막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고 적극적으로 앞에 나서고픈 마음도 꽤 있던 시절이었다.

 농민회 내에서도 준석에게 이장을 맡으라는 권고를 했다. 마을 사정을 아는 친구들은 다른 사람이 이장을 맡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장에 나서기로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준석이 이장으로 나선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정선택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은 몰러두 준석이만은 안 뒤야. 갸가 하는 뇡민횐가 뭔가는 야당보다두 더한 데여. 야당두 어림읎는 판에 뇡민회가 되믄 우리 마을은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될 것이니께 알어서들 허라구.”  

  그 때 정선택이 집집을 돌며 한 말이었다. 그러면서 정갑철이를 이장으로 삼자고 주민들을 설득했다. 가죽이 모자라서 찢어진 게 아니라면 누구의 눈에나 준석이 갑철보다 몇 곱절 낫다는 걸 알 수 있었겠지만 정선택이 평생 동안 마을 사람들 사이에 쌓아놓은 벽은 두터웠다.

그는 정갑철이 이장이 되면 자신이 옛날처럼 뒤에서 마을 일을 보겠다며 설득했고 거창하게도 마을회관을 새로 짓겠다는 약속을 했다. 나중에 알게 된 바로 정선택은 시청 공무원인 사위를 통해 산동면에 마을회관 증축보수 예산이 잡혀있다는 정보를 들었고 면내에서 가장 낡은 시곡 마을회관이 대상이 될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기왕에 이장에 나서기로 했으면서도 준석은 그런 정선택의 갈망스런 짓거리에 일절 대응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정갑철이를 이장으로 세우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게다가 무슨 면의원 선거도 아닌 이장을 뽑는 일에 이러니저러니 스스로를 내세워 말을 보탠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상했다. 어쨌든 마을이 생기고 처음으로 두 명의 이장 후보자가 나선 그 해의 대동계 날에 준석은 단 한 표 차이로 떨어지고 말았다. 참으로 황당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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