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마을 7회

최용탁 장편소설 '들녘'

  • 입력 2013.04.12 16:03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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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대학에 들어가는 자녀나 손자 있으신 분 계신가요? 장학금 때문인데요, 시곡에선 아무도 없구먼요. 다음에 각자 찾아뵙고 말씀드리겠지만, 올해 화재 공제나 안심운전자 공제가 만기 돌아오는 분이 몇 집 있네요.”

  이상태를 따라온 박한주가 서류를 뒤적여가며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공제 담당으로 상무인 그녀는 오십 줄을 넘어선 지가 한참 지났는데도 주름살 없는 얼굴이 탱글탱글했다. 그녀는 연봉이 조합장보다도 많다.

일반 보험 모집인들은 발이 닳도록 뛰어다녀도 뜨악하게 쳐다보기 마련이지만 시골에서는 농협에서 하는 공제라고 하면 그저 들어야 하나보다 하고 선뜻 들게 마련이라 박한주에게는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 어떻게 돌아가는 조화속인지 무지렁이들이 알 리 없는데 아마 거기에서 떨어지는 커미션이 상당하다고 했다.

  “어뜨게, 손님들은 다들 돌아가셨으니께, 너무 술 드시기 전에 이장 선출 이야기를 해야것쥬?”

  조합장이 돌아가고 자리가 정돈되자 양만득이 입을 열었다. 술을 마셔도 너무 마시는 사람은 양만득 자신뿐이었고 양만득 버금가는 술꾼인 이장 정갑철이는 웬일인지 술잔을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할 뿐 평소답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지 않고 눈만 이리저리 굴려 눈치를 살피는 평소의 모습만은 그대로였다.

  “에에, 본래 이장 자리는 한두 번씩 하고 쉬었다가 다시 하고 그러는 거주만, 지금 정갑철 이장님이 한 번 더 하는 걸루 들었습니다만, 워떠신가유?”

  양만득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부녀회장인 두섭이네가 손을 번쩍 들었다. 굳이 손을 들지 않고라도 얼마든지 말을 할 수 있는 자리건만 손을 든 그녀의 얼굴은 큰 결심이나 한 사람처럼 상기되어 있었다. 

  “이웃 간에 이런 말씀 드리기가 좀 저기하지만서두유, 솔직히 지금 이장님이 더 하는 건 전 찬성 못해유. 속으루는 다덜 같은 생각이실 거유. 호식이 아부지가 이장보구 부텀은 사실 암것두 된 일이 읎다구 봐유.”

  단단히 벼르고 하는 이야기치고는 별 알맹이도 없이 말꼬리를 내리는 모양새였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모인 여자들 거의 모두가 두섭이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사실 정갑철이가 이장을 본 동안은 시곡에 이장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개나 소나 돌아가면서 앉히는 자리라지만 정갑철이는 해도 너무했던 것이다. 워낙 두름성도 사교성도 없을뿐더러 남 앞에서는 도무지 말을 할 줄 모르는 위인이었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회의에 가서도 몇 년 동안 군입 한 번 떼지 않아 모르는 사람은 벙어리로 알더라는 이야기를 준석도 간간이 들었다. 정상이라고는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우울증 같은 데에 평생을 묶여 사는 사람이었다. 산 아래 바싹 붙은 허름한 두 칸짜리 오두막에서 내내 나올 줄을 모르던 사람이 그나마 바깥출입을 시작한 게 오십이 넘어서였다. 그러니까 고작 십년 안짝을 주민으로 살았다면 살아온 이였다.

평생 한 일이라곤 칠백 평짜리 논 한 떼기를 부쳐낸 일, 주로 남의 일을 다니는 애꾸눈이 마누라를 쥐어 팬 일, 날마다 얼마나 마시는지 모를 소주병을 축낸 일 정도였다. 그런 그를 이장에 앉힌 이는 하도 멀어서 촌수조차 가늠할 수 없는 일가붙이인 정선택이었다.

  시곡 마을에서 이장은 기실 꽤 쏠쏠한 자리였다. 워낙 가구 수가 적어서 할 일이 별로 없는데다 이장을 보면 아직 동계 소유로 남아있는 논 칠백 평을 도조 없이 부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마을이 작아도 관에서 나오는 녹은 큰 마을과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한 달에 이십오만 원 월급에 농협에서 따로 십만 원이 나왔다. 두어 달에 한 번씩 보너스도 나오고 아이들 학비까지 지원되니까 내동 내 땅에서 손발을 놀리지 않으면 고린 동전 한 푼 나올 데 없는 시골 살림에 적잖은 도움이 될 만한 자리였다. 그리고 시곡에서 그 자리는 오랫동안 정선택의 자리였다. 준석도 거기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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