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마을 6회

최용탁 장편소설 '들녘'

  • 입력 2013.04.05 09:23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에, 조금 더 있으면 저희 농협 사업보고서가 나올 것이고, 그걸 보믄 아시겠지만, 올해 우리 농협은 타 지역 농협보다 참 사업을 잘했다고 헐 수 있습니다. 아마 배당두 작년보다 더 할 거 같습니다. 다 여러분덜이 도와주신 덕분입니다만, 지가 쬐끔 서운한 말씀을 드리자믄, 그 농약이나 농자재럴 왜 개인업자한테 이용하느냐, 이 말씀입니다. 제가 이해를 못하겠는 것이 십원이 싸도 농협이 더 싸고 나중에 이용고 배당도 하는데, 그리고 농협은 어차피 조합원 여러분덜이 주인인데, 주인이 자기 것 놔두고 남의 집 가서 사 쓴다는 건 좀 이상허지 않습니까? 제가 산동농약사 하고 개인적인 감정이 있다고들 모르는 말씀을 허는 분덜도 계신데, 절대 그런 게 아니고요. 여러분덜이 조금이라도 더 혜택을 보는 쪽으루 해야허지 않겠냐, 이런 충심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상태가 하는 얘기를 듣고 준석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얘기를 삼켰다. 농약이나 농자재를 주로 쓰는 사람들은 과수원을 하는 네 집이었다. 논농사에 쓰는 농약은 거의가 공짜 비슷하게 나오고 일 년 내내 써봐야 백만 원도 넘지 않는 집이 대다수였다. 과수 농가 네 집은 각자 줄잡아도 천만 원 넘는 금액을 농약이나 농자재에 쓴다. 그러니까 이상태가 지목하는 사람은 마을에서 그 네 집을 일컫는 것이었다. 

  평소에 스스럼없이 구는 터에 따로 이야기해도 될 것을 굳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런 식으로 꺼내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준석이 산동농약사를 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을 그가 모를 리 없고 개인적인 감정 운운하는 것도 준석을 겨냥한 말인 것만 같았다.

산동농약사의 박태희와는 산동초등학교부터 농업고등학교까지 줄곧 함께 다닌 동창이자 친한 친구였다. 그 박태희가 조합장 선거 때 이상태와 맞붙었던 전직 조합장의 참모장 노릇을 했던 게 이상태와 어긋나게 된 계기였다. 준석은 사실 처음에는 이상태를 찍었던 게 사실이었다. 친구인 박태희를 보자면 당시 현직 조합장이던 구태서를 찍어야 했지만, 도무지 중앙이나 가락시장에서 말발을 세우지 못한다는 이상태의 집요한 공세에 솔깃했던 것이다. 

  구태서는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줄곧 농사를 지어온, 그러니까 진짜 농민 출신의 조합장이었는데, 인품이 좋고 남 일을 제일처럼 발 벗고 나서는 사람이어서 면내에서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조합장이 되고나서 딱히 큰일을 한 것은 없지만 그렇다고 허물이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 밑에서 상무 노릇을 하던 이상태가 퇴직을 하고 조합장에 도전을 한 것이었다.

자기가 겪어보니까 사람은 훌륭하지만 제대로 농민을 위해서 농협 일을 할 인물은 아니라는, 내막을 잘 알고 중앙에 연줄이 있는 자신이 한 번 해보겠다는 이상태의 주장은 주로 과수원을 하는 농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래서 간발의 차이로 이상태가 당선되었던 것이다. 준석은 구태서를 몹시 따르고 좋아했지만 그 때는 뭐가 씌었는지 이상태 이름 옆에 도장을 찍고 말았다. 

  그런데 첫 임기에는 열심히 뛰는 것 같던 이상태는 점점 하는 꼴이 이상해져갔다. 우선 대의원들을 밤에 불러내어 시내의 룸살롱에 데리고 가서 술을 퍼 먹인다는 소문이 돌았다. 대의원인 준석도 몇몇과 함께 삼겹살집으로 불려가 저녁을 얻어먹기는 했다.

술도 마시지 않고 고기도 즐기지 않는 준석은 그날따라 속까지 불편해 먼저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새벽이 되어서야 시내에서 대리운전을 불러 돌아왔다는 거였다. 식사 한 끼 정도야 조합장 앞으로 나오는 판공비를 그런 데 쓰는 거려니 하고 넘기겠지만, 아무리 시골이라도 기십만 원은 넘게 나올 룸살롱까지 출입한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구워삶아서 그랬는지 어쨌는지 이듬해 총회 때 조합장 연봉을 갑자기 이십 프로나 올리는 안이 별 이의 없이 통과되기도 했다. 그리고 툭하면 서울 출장을 가는 게 경매장이나 도매시장이 아니라 농협중앙회에 드나드는 것이란 소문도 돌았다. 그리고 얼마 후 이상태는 농협 중앙회장의 선거권을 갖는 중앙 대의원이 되었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