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마을 5회

최용탁 장편소설 '들녘'

  • 입력 2013.03.29 15:18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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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내에서도 작은 마을인 시곡 마을이 부자 마을 소리를 듣게 된 연유가 있었다.
  본래 빈촌인 산동면 여러 마을 중에서도 시곡은 더 살림살이가 째는 마을이었다. 산동면 전체가 특별히 내세울 게 없는 흑싸리 껍데기 같은 곳이었다. 소백산맥 줄기라도 이름 있는 산도 없어, 근동의 사람들도 나이 어린 축은 알지도 못하는 장지산이니, 깨금봉이니, 태장골이니 하는 3,4백 미터쯤 되는 산에 이름도 없이 앞산 뒷산으로 불리는 낮은 산들이 엎드린, 어찌 보면 무색무취한 충청도의 작은 고을인 것이다.

내세울 것 없는 동네가 그렇듯 맑은 공기나 깨끗한 물 정도가 억지로 끌어다대는 자랑이면 자랑이었는데 언제부턴가 소, 돼지를 대규모로 키우고 골프장까지 들어서면서 동네 개울에는 아예 발도 담그지 못하게 되어 그나마도 허튼 소리가 된 지 오래였다.

게다가 시곡 마을은 밭이 별로 없이 주로 논농사였고 그나마 제일 많은 집이 육천 평 정도여서 작은 동네에도 한 둘은 있게 마련인 부잣집 소리를 듣는 집이 아예 없었다. 열여덟 가구 중에 아예 노동력이 없어 농사를 작파한 집이 여섯이었고 두 집은 주소지만 이곳에 있을 뿐 생계는 시내에 두고 있었다. 어쩌다 산지로 이름을 얻게 된 사과 농사를 짓는 네 집이 조금 나은 정도이지만 그 역시 앓는 소리가 없어 나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 시곡 마을이 부자 소리를 듣는 것은 순전히 마을의 공금이 동네에 어울리지 않게 칠천여 만원 넘게 쌓여있는 탓이었다. 지금은 고작 세 집이 남아있을 뿐이지만 원래 시곡은 정(鄭)씨 집성촌이었다. 한 때 삼십 호가 넘던 마을에 정씨가 절반 이상을 차지했던 적도 있었다. 마을의 거의 모든 땅을 정씨 일가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타성바지들은 거개가 소작이거나 행랑살이였다. 당연히 정씨 아닌 사람들은 기를 펴지 못하고, 동리의 일을 정씨들이 모두 좌지우지했다.

 

그리고 언제인지 알 수 없을 때부터 마을 공동 소유의 논이 두 뙤기 있었다. 합쳐서 천이백 평 정도 되는 그 땅 중 팔백 평이 칠년 전에 국도로 들어가면서 육천 만원의 보상을 받게 된 것이었다. 마을에 돈이라고는 없어 겨울 내내 군내 나는 김장김치만 날로 먹고, 볶아 먹고, 끓여먹던 시곡에 갑자기 어마어마한 돈이 생긴 것이었다.

그 돈을 농협에 적금으로 넣어놓고 이자를 가지고 일 년에 한 번씩 관광버스 대절해서 나들이도 하고 마을회관 냉장고에 돼지고기도 떨어지지 않게 들여놓는데도 돈이 새끼를 쳐서 지금은 칠천 만원으로 불어났다. 졸지에 시곡에서 제일 부잣집은 다른 누구도 아닌 마을회관이 되었다. 요즘은 정부에서 기름 값을 대주지 않나, 쌀은 물론이고 반찬값까지 따로 나오는 터라 아예 겨울이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회관에서 삼시세끼를 끓여대었다. 

  토지 보상을 받던 때에 우여곡절이 있기도 했다. 정씨 종가까지 마을을 뜨고 종가에서 한참 곁가지로 떨어진 정선택이 남아있는 정씨 집안의 대표 격이었는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공동의 논은 본래 마을 공동 소유가 아닌 정씨 문중 땅이라는 것이었다. 고로 보상금은 정씨 문중의 것이라는 것이 그의 강력한 주장이었다. 서준석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그 주장을 받아들일 리 없었다. 엄연히 동계에 들어와 있는 땅을 자기네 문중 땅이라고 우길 근거가 없었다.

정선택은 당시 자기네 문중에서 마을에 땅을 내놓을 때는 마을이 곧 정씨네 것이었으므로 동계나 문중이나 구분을 짓지 않았다는 거였지만, 설사 그랬다 할지라도 이제 와서 돌이킬 수는 없었다. 자신의 말이라면 섶을 지고 불로 들어가래도 고분고분 들을 줄 알던 정선택은 길길이 날뛰었지만, 같은 정씨 두 집만 빼고 모두 아무도 그의 편을 들지 않았다. 특히 정선택의 같잖은 주장에 강력하게 반발한 사람이 서준석이었다. 

  “느 애비가 살아있으믄, 내 말이 하나두 그르지 않다는 걸 알 게다. 이 은혜도 모르는 불상놈 같으니라고.”
  그 때 펄펄 뛰던 정선택이 퍼부은 말을 준석은 여태껏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삼십 년 전에 죽은 아버지 필성은 정씨 종가의 행랑살이를 했었다. 그리고 언젠가 열 살이나 어린 정선택이 필성의 따귀를 연거푸 후려치던 것도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준석이 아직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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