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슬(감자)

  • 입력 2013.03.29 15:14
  • 기자명 한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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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방만 더" 영화보다 더 비극적인 현실을 할머니는 담담하게 말했다. “무서운 시상을 살았노라”고, 내겐 고모부 되시는 분이 세칭 부역자였다.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부역자가족을 즉결처분하는데 그 어머니가 설맞아 죽지 않고 고통스런 신음소리와 함께 내뱉은 단말마.

제주는 지금쯤 감자를 다 캐내고 다른 작물을 심느라 손이 분주할 것이다. '지슬' -땅의 열매, 제주도민의 삶과 한이 서린 감자는 오늘도 그들의 삶의 중요지점이다. 한해농사는 전쟁이 나도, 아비가 죽어도, 태풍우가 쳐도 포기할 수 없는, 포기하면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는 그들의 모든 것이었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때 그 땅에서 은밀하게 속삭이며 싹을 틔우던 지슬은 오늘도 그 기억의 꼭지마다 싹을 틔운다.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 부러지고 잘린, 그들의 삶, 그 모습이 날 것처럼 우리에게 다가왔다. 독립영화, '지슬', 감독 오멸은 말한다. 역사 바로잡기라구요? 난 그런 작업안합니다.그들이 살아온 "한 방만 더" 같은 사실을 그대로 보이게 할 뿐이다. 나머지는 보는 사람들이 알아서 느낄 일이다. 그것이 영화 지슬의 미덕이다.

박근혜대통령이 시장에서 감자를 들어 코 끝에 대는 모습이 카메라에 찍혔다. 참외를 들어 코 끝에 대는 것은 참외가 잘 익었는지를 살피는 사람들의 오랜 습성이다. 그는 감자에서 무엇을 맡으려 했을까. 강원산인지 제주산인지를 코끝으로 분별하려 했을까?

우습다. 뭔가 번지수가 잘못 짚어진 새정부 조각을 예고하듯 어설퍼 보이는 모습이었다. 아니 혹시라도 그 감자가 제주산이었고 그 감자에서 지슬의 정체를, 지슬의 분노를 맡으려 했는지도 모른다고 믿고 싶다. 대통령이 제주도민들에게 약속한 4.3사건의 해결공약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제주도사람들의 삶을 떠 받쳤던 감자나 감귤이 타격을 입게 될 한중일FTA가 26일부터 시작 되었다. 수탈과 박해의 대표적 특산물인 감귤은 제주도민에겐 애증의 산물이다. 한때는 수탈에 저항해 감귤나무를 불질렀지만 근래는 제주도를 풍요롭게 한 고마운 특산물이다. 거기에 더해 지슬은 제주도 사람들의 목구멍을 유지한 산물이다. 논이 없는 제주에서 유일한 식량은 지슬이었다. 이것들이 한중일 FTA로 다시 한 번 제주도에 눈물을 뿌리게 할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감자를 코에 댄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저런 얽히고설킨 문제들이 머릿속을 여러 차례 헤집은 결과물이라 믿고 싶다.  

그러나 믿기지 않는다. 과거는 역사가들에게 맡기고 미래를 보자고 했다. 그러나 미래는 아직 어디에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점점 더 “김일성개새끼” 해보라고 하는 종북몰이에서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에게 “링고(사과)라고 말해보라”고 해서 발음이 제대로 안 나오면 학살했다는 사실이 떠올려지는 두려움의 세상으로 가고 있다. 아! 잔인한 봄, 레드 아일랜드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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