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마을 4회

최용탁 장편소설 '들녘'

  • 입력 2013.03.22 09:05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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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황당은 윗말과 아랫말을 나누는 산굽이를 돌아 서 있었는데, 그 옆으로 약수터가 하나 있었다. 지금도 바위틈을 뚫고 나와 사철 마르지 않는 샘물 맛은 잡내 없이 시원하여 여전히 놓여있는 표주박으로 목을 축이곤 한다.

그 전에는 약수라는 소문이 있어 먼 데서도 물을 뜨러 오는 사람이 적지 않았는데, 몇 년 전에 시에서 약수터 수질검사라는 것을 한 다음에 음용 부적합수 판정을 내린 다음부터는 그만 졸지에 약수터의 지위를 잃어버리고 옹달샘 정도로 전락한 곳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약수터가, 그러니까 어찌된 연유인지 몰라도 오염되어 부적합수가 되기 한참 전인, 19세기 말엽에 영험한 약효를 발휘했다는 전설이 있었다. 때는 역사에서 임오군란이라고 이름 붙인 난이 일어난 1882년이었다.

군란을 당한 민비가 백여 리쯤 떨어진 장호원 인근에 숨어 있을 때, 장염인지 이질인지 배앓이가 몹시 심하여 백약이 듣지 않았는데 불려간 어느 한의가 이 약수터의 물을 떠다 마시게 하고 그 물로 탕약을 다려 병을 낫게 했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환궁한 민비가 그 일을 잊지 않고 마을에 쌀 백석과 함께 약수터를 잘 모시라는 전교를 내렸다고 했다.

감읍한 백성들이 약수터 옆 성황당에서 왕비의 만수무강을 비는 고사를 해마다 드렸고 그런 연고로 이 마을 이름도 모실 시(侍)자를 쓴 시곡(侍谷)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모신다는 말을 옛날에는 고인다고 했어. 받들어서 귀하게 모신다는 말이 고인다는 말이고 그래서 굄골이 된 것이여.”

  정선택이 긴 얘기를 끝내자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사슬에서 풀려나기라도 한 듯이 저마다 일어나 화장실로 향하기도 하고 소주잔을 들고 서로 권하기도 했다. 양만득만이 다음 순서를 어찌 잡아야 할지 몰라 엉거주춤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 그런 사연이 있었구만요. 그러고 보면 여기 시곡이 우리 면내에서 제일로 유서가 깊은 마을이겄네요. 어쨌든 오늘 동계 잘 허시구요. 참, 이장님은 계속 허시는 건가요? 올해 새로 뽑으시나요?”

  제가 할 일을 잊고 있었다는 듯이 안승만이가 묻자 일순 좌중이 조용해졌다. 실은 이장을 새로 선출하는 것이 오늘 동계의 가장 큰 안건이었다. 그리고 며칠 전부터 마을에는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무에, 젊은 사람이 없어서 이장 볼 사람도 없네그랴. 어찌 되었든 결과가 나오면 바로 알려줌세.”

  정선택이 체머리를 흔들며 마치 마을 대표인 것처럼 말을 마치자 안승만이는 같이 온 여직원이 운전하는 차에 올랐다. 그리고 시동을 걸고 떠나기도 전에 까만 승용차가 들어와 회관 앞에 섰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조합장 이상태와 공제와 신용 사업을 담당하는 박한주였다. 

  “점심들 벌써 다 드신규? 밥 남었으믄 두 그릇만 줘봐유.”

  이상태도 반죽 좋기로는 안승만이 찜쪄 먹을 위인이었다. 승용차 뒷자리에서 내린 것도 또 소주 한 박스였다. 

  “아따, 술꾼이라곤 서넛도 안 되는 동네에 쇠주만 수십 병이 들어오네. 술 대신 고깃근이나 사오면 좀 좋아? 노인네들 반찬거리도 읎넌데.”

  이상태는 서준석보다 세 살이 위였지만 대충 트고 지내는 사이였다. 오년 전에 조합장에 출마한 이상태가 찾아와 술을 마시면서 아예 친구로 지내자며 너나들이를 하자고 했었다. 나이로 보아 그럴 수 없다고 했는데도 막무가내로 친구처럼 대하는 이상태를 따라 어느새 그런 사이가 되고 말았다.

 겉으로는 두루춘풍으로 누구에게나 더없는 호인처럼 대하지만, 속으로는 능구렁이를 몇 마리쯤 기르는 위인이었다. 더구나 운도 참 억세게 좋은 사내였다. 조합법이 바뀌는 바람에 임기를 마친 후에도 이년이나 더 선거도 없이 조합장 자리에 있게 된 것이다. 

  “반찬거리가 읎어? 시곡 회관 냉장고에 쇠고기, 돼지고기가 켜켜이 쌓여있다고 허드만, 무슨 소리여? 부자 동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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