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만난 농민] 16. 김제 김성모

"왜 그런 줄 아세요? 소 때문이에요"

  • 입력 2013.01.27 23:53
  • 기자명 김희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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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역에 내리자 김성모(43) 씨가 마중 나와 있었다. “나를 보러 서울서 여기까지 와주셨는데 당연히 나와야지요”하는 그의 말엔 무던함이 배어있다. 첫 인사를 마치고 숨 돌릴 틈 없이 김 씨는 나에게 질문을 했다. “기자님은 우리농업을 어떻게 생각해요? 우리 농업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은요? 요즘 해외는 농업 대책이 어떻다고 하던가요?” 아, 공부를 조금 더 해둘걸…. 김 씨는 자신을 축산업 초년생이라고 소개했지만 1998년부터 한우를 키우기 시작한 것이 어느덧 15년차에 접어들었다.

그는 방역 문제로 자신의 농장 근처에 차를 세워두고는 축산업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저 축사는 후계자 자금을 받아서 지은 거예요. 후계자 자금이 5년 거치 10년 상환인데 8~9년 갚았으니까 저 축사도 그 정도 됐을 거예요. 또 저쪽에도 축사가 있어요. 여기 저기 합치면 90두 조금 넘을 겁니다. 요즘은 100두를 기업농이라고 하던데 사료값이 계속 오르다보니까 축산업 한다고 말하기도 어려워요.” 어려움이 일상처럼 반복되고 있는 요즘 축산농민들에게는 ‘사료값’이 화두였다. 그놈의(?) 사료값 때문에 버리지도 키우지도 못하는 축산업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저는 트랙터 4대가 있어요. 얼마 전에 중고 트럭도 새로 샀고요. 또 축사 옆에 비닐하우스를 짓고 포도를 키운 적도 있고, 혼자 이앙기 끌고 가서 모를 심고 모판을 나르고 하면서 모내기를 한 적도 있어요. 이게 다 왜 그런 줄 아세요? 소 때문이에요.”

그는 소 때문에 기계와 차를 샀다. 농업부산물을 이용해 사료를 만들면 생산비가 절감된다고 해서 트럭을 끌고 여기저기 농업부산물을 구하러 다녔다. 그렇지만 농업부산물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그나마 볏짚 묶는 트랙터(원형 베일러)로 주변 농가의 일을 도와주고 볏짚가격을 충당하고 있다.

그가 하는 일, 했던 일은 모두 소를 위한 일이다. 볏짚값을 아끼기 위해 벼농사를 지었고, 사료값을 충당하기 위해 포도를 키웠다. 지난 15년간 축산업을 하고 있고, “지구의 종말이 오기 전 까지는 축산업을 하게 되겠죠”라며 미래를 예고하던 그의 첫 꿈은 예상을 한참 빗나간 ‘농기계 센터 사장’이었다.

▲ 김제 농민회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 김성모(43)씨는 하루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게 바쁜 생활을 한다.
“꿈…. 그러고 보니까 요즘 살면서 꿈을 잊고 살아서 그렇게 힘들었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는 농기계 센터를 차리는 게 꿈이었어요. 그래서 농기계 기능사 자격증을 땄죠. 학교가 끝나면 농기계 센터에서 일을 하던 친구가 여기엔 비전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 후에는 카센터를 차리려고 택시운전도 했어요. 개인택시를 갖고 싶다는 마음도 생겼는데 더 많은 사람을 태우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제 자신이 너무 초라해져서 택시를 접었죠. 그때부터 축산업을 하기까지는 꿈이 사라졌었다고 봐야죠.”

김 씨는 멀리 돌아와 결국 축산업에 몸담고 있다. 그러고 보면 그의 꿈에는 모두 ‘노력’이 있다. 지금 그가 소를 위해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것처럼 그의 꿈은 노력이라는 원동력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소에게 영양가 있는 사료를 먹이겠다고 방송통신대학교 식품영양학과를 다닌것도, 부업으로 ‘가축인공수정사’ 자격증을 딴 것도 결국 소를 위한 노력이었다. 오후에 인공수정으로 부탁전화가 오면 부리나케 달려간다. 그는 또 말 한다 “소 때문에요.”

자리를 옮겨 김제시농민회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김제시농민회 교월동 총무도 겸하고 있는 그는 축산업 초년생이라기보다 농민회 활동 초년생이다.

“농민회 활동한지는 3년 정도 됐어요. 농민회에 들어와서 농업을 바꿔 보겠다는 거창한 생각은 아니었어요. 농업에 대해서 알고 싶었죠. 활동을 하면서 농민들도 우리들의 이득만 챙기려고 하면 안 된다는 생각도 들고 많이 배우고 있는 상황이죠.” 김 씨에게 농민회 활동이 재미있냐고 묻자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던 조경희 사무국장이 한마디 거들었다. “재미로 안하면 못하는 거야 이제는…. 언제까지 희생하는 마음가지고는 안 돼.” 조 사무국장의 말에 김 씨는 대답했다.

“농민회 활동을 하면서 농민이라는 것이 혼자가 아니라는 마음이 생겨요. 내 입장을 대변하고 나와 같은 처지가 있어 위안이 된다고 할까요. 농사를 이렇게 지으면 좋다 저렇게 지으면 안 된다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기쁘고요. 저는 아직 풋내기니까요.”

그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배우기를 좋아하고 꿈을 사랑할 줄도 아는 사람이다. 인생의 절반을 배움으로 그리고 꿈이 있는 사람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런 그는 마지막 꿈에 대해 말한다. “소는요. 끝까지 함께 갈 동반자죠.” <김희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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