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

  • 입력 2013.01.25 13:32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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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후배 작가가 쓴 글을 읽다가 곰곰 생각에 빠진 적이 있다. 그는 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찾아 그들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써서 발표하는 르포작가인데, 자신이 사랑에 중독되었다고 했다.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다.

물론 그가 말한 사랑이 남녀 간의 그런 사랑은 아니다. 그 사람의 삶, 혹은 인간미를 뜻하거나 어쩌면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애정을 뜻하는 것이리라. 꼭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도 나쁜 덕목이라고 할 수는 없는데, 나는 그런 모습을 지켜본 적이 있다. 

  어느 날 그가 내가 사는 충주에 와 이른 시간에 술집을 가게 되었다. 평소에 안면이 있는 술집 여주인과 몇 마디 인사를 나누고 앉았는데, 후배는 주인의 인상이 범상치 않다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예순을 넘긴 여주인에게 고향이니, 불경기니 하는 시답잖은 질문을 던지는 어투가 참으로 다정다감했다.

무어랄까, 진정성이 흠뻑 배어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결국 주인은 우리 자리에 앉아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후배의 인터뷰 솜씨는 놀랄만 했다. 그 날 주인은 카운터까지 종업원에게 맡긴 채 무려 두 시간 넘게 자신의 삶을 들려주었다.

단골인 나로서도 전혀 모르던 그녀의 일생이 후배의 녹음기에 고스란히 녹음되었다. 이야기를 들으며 웃고, 슬퍼하고, 공감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사람을 진정으로 대한다는 게 이런 거로구나, 하고 속으로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가 골방에서 혼자 쓰는 글이 아닌 사람을 만나서 쓰는 인물 르포작가가 된 게 우연이 아니었다.   

  사랑에 중독되었다는 그의 말이 새삼 실감이 난 건 그 기억 때문이었다. 그리고 과연 나는 자신 있게 무언가에 중독되었다고 할 만한 게 있나 돌아보게도 되었다. 물론 금세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있긴 하다. 수십 년을 이어온, 중독도 심한 중독인 술, 담배 따위가 그것인데, 사랑에 중독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맞서기엔 창피한 노릇이니 내세울 수가 없다.

그렇다면 또 무엇이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한때는 무언가 활자로 된 게 곁에 없으면 불안한 활자중독증을 겪기도 했지만, 어느 사이 말끔히 치유되어 며칠이 가도 책 한 자 읽지 않는 날이 많으니 그도 내세울 수 없다. 뉴스에 중독되었다고 생각한 적도 있긴 하다. 컴퓨터를 켜면 별 필요도 없는 뉴스를 시시콜콜히 찾아서 몇 시간이나 들여다보곤 하면서 대체 내가 왜 이러나 하기도 했지만, 요즘은 며칠씩 들여다보지도 않으니까 이 또한 치유되었다. 지난 대선이 결정적인 치료약이었다.

  곰곰 생각하니, 내게도 조금 이상한 증상이 하나 있다. 언제부터인지 하루에도 몇 번씩 과수원을 도는 일이다. 아무 일이 없어도 최소한 네댓 차례는 과수원을 다니며 나무들을 보고 또 본다. 산책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 생각하니 일종의 중독이 틀림없다. 요즘 같은 겨울철에도 방안에 두어 시간 이상 있으면 견디지 못하고 과수원으로 간다.

매서운 바람이 불거나 신발에 눈이 들어와 양말을 적셔도 그 행보를 그치지 못한다. 그것이 내가 밟는 땅인지 나무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기이한 행태임이 분명하다. 스스로 짐작하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 나는 아마 농사에 중독되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지난 열여덟 해 동안 그 속에서 살아온 시간이 나를 붙들어 맨 것일 게다. 나이도 이미 적지 않지만, 나는 이제 다른 일은 하지 못할 것이다. 한 때는 농사를 때려치우고 다른 일을 해보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거듭되는 적자 농사에 부아가 나서 어느 친구가 권하는 대로 유망한 프랜차이즈 분점을 시내에 내보려고 진지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미 땅에 포박된 것 같다. 얼마 전부터 내가 살고 있는 주변에 산업단지가 들어설지 모른다는 풍문이 돌고 있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처음 떠오른 생각이 어디든 또 땅을 구해야한다는 마음이었다. 결국 농사도 중독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랴, 중독에서 벗어나는 일이 무망한 바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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