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바위

  • 입력 2013.01.18 14:13
  • 기자명 한국농정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개미지옥이라는 것이 있다. 모래밭에 깔때기 모양의 구덩이를 파고 그 꼭짓점에 숨어 있다가 구덩이로 굴러 떨어지는 개미를 잡아먹는다. 한번 깔때기 안에 발을 들여 놓으면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빠져 들어가 목숨을 잃게 된다. 자연의 법칙이지만 무서운 생각이 든다.

 인간도 인간보다도 우월한 생물체에 의해 개미지옥 같은 것이 만들어 진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런데 인간은 언제부턴가 인간들 끼리 개미지옥을 만들어 놨다. 자본주의, 돈이 그렇다. 끝없이 이윤을 내야 하는 것이 자본이다. 이윤이 없는 자본은 단지 교환수단으로 작용할 뿐이다.

 그렇지, 원래 교환수단이상의 가치를 가질 수 없던 화폐가 스스로 몸집을 불리는 이윤을 만들어 내면서 개미지옥은 더욱 교묘한 구조로 완성되었다. 그것은 수탈과 착취를 일상화하고 일반화 하였다. 지금은 누구도 이 메커니즘에 자유로울 수 없다.

 부여 내산에 가면 미암사란 절이 있다. 절 뒷마당엔 ‘미암’이란 커다란 바위가 서있다. ‘쌀바위’, 쌀을 신성시하던 우리네 조상들이 그리 불렀을 것이다. 한쪽에서 보면 꼭 쌀알을 세워놓은 듯하다. 그래서 ‘쌀바위’고 미암사란 절이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쌀바위’엔 언제나 그렇듯이 전설이 내려온다.

 한 가난한 할미가 산에서 나물을 캐어 먹고 살았다. 하루는 산에 오르니 그동안 못 보던 바위가 솟아 있어 기이하게 여기고 기도를 드렸단다. 그러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에 부처가 나타나 바위 밑을 조금 파보면 쌀이 나올 것이라 현몽했단다. 거기서 나오는 쌀은 하루 양식 이상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제하면서. 꿈에 깨어난 할미가 부처님 시키는 대로 쌀을 퍼내 손주들을 먹여 살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게 된 욕심 많은 중이 쌀이 나오는 곳을 뒤집어 파니 쌀은 안 나오고 피가 나오더란다.

 인간의 절제되지 않는 욕심을 경계하는 전설이고 교훈이다. 그런 식의 이야기들은 우리주변에 숱하게 많이 회자 된다. 안팎에서 욕심을 경계하라는 말을 듣고 자란다. 그러나 자본은 쓰러지지 않으려면 끝없이 달려야 하는 자전거와 같다. 지구상의 모든 자원이 고갈되던지  말든지 이윤만이 최고의 선이 된다.

 결국 인간도 지구도 멸망의 길로 끌려간다. 하나님을 앞세워 살인과 약탈을 감행한 시대부터 글로벌 착취가 우리들 눈앞에서 벌어지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약탈까지 사람들의 눈을 가린 것은 욕망이었다. 

 ‘쌀바위’를 올려다보는 ‘저동뜰’에 넉넉하지도 빈궁하지도 않게 저녁햇살이 비춘다. 이렇게 소박 하게 사는 사람들의 밥 냄새가 그리워지는 저녁시간에 누구네의 대문을 두드리면 따뜻한 밥 한 그릇이 나오는 그런 세상이 필요하다. 사람들을 개미지옥으로 떨어뜨려 잡아먹는 구조는 지속적이지 못하다.

 경쟁이란 누가 개미지옥으로 떨어지느냐의 생살여탈의 문제다. 우리에게 지속가능한 삶이란 농업으로부터 출발한다. 농민들이 먼저 서로의 손을 잡고 우리가 만들어 왔던 상호부조의 공동체를 복원하면 된다. 쌀바위 전설은 지속가능한 삶에 대한 인간의 지혜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