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행

  • 입력 2013.01.11 13:29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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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 일찍 집을 나서 터미널로 향했다. 충주에서 하루 다섯 번 왕복하는 광주행 버스는 첫 차가 여덟 시다. 한 시까지 5.18기념공원에 도착해야 하는 약속이라 조금 초조하기는 했다. 평상시 같으면 넉넉한 시간이지만 눈이 많이 온 끝이라 제 시간에 닿지 못할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걱정도 잠시, 남도로 가는 길은 시원스레 뚫려 있었다. 광주에 도착한 게 정오였다. 긴 시간 동안 참았던 담배를 피려고 하니, 웬걸 터미널 안팎이 모두 금연구역이었다. 갈수록 설자리가 없어지는 끽연가 신세를 면하려면 결국 담배를 끊을 수밖에 없겠다는 한탄을 하며 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역시 어느 곳과도 비교가 안 되는 맛난 한정식으로 점심을 먹고 곧바로 택시를 타고 공원으로 향했다.

  길가에는 내가 타고 갈 전세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온 이들과 반갑게 인사를 하고 있으려니 속속 아는 얼굴들이 버스에 올라온다. 서른 명 남짓 되는 이들을 태우고 버스는 지리산으로 출발했다. 구례군 산동면, 장엄한 지리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한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그리고 곧바로 회의가 시작되었다. 버스를 타지 않고 따로 온 이들까지 오십여 명이었다.

 내가 참석한 회의는, 내게 삶의 지침이 되었던 윤한봉이라는 분의 기념사업회 정기총회였다. 호남 출신으로 광주항쟁의 주모자로 수배 중에 미국으로 밀항하여 십삼년 동안 망명 생활 끝에 귀국하여 활동하다 오년 전에 세상을 뜬 분이다. 

  총회는 한 시간만에 끝났지만 내게 큰 감동과 반성의 시간이 된 것은 2부 순서로 마련된 미얀마 민주화운동가인 소모뚜 씨의 강연이었다.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타민족 형제들이 우리나라에서 겪고 있는 문제들은 충격적이었다. 그들의 아픔을 외면하고 마음 편히 살 수는 없다는 자각이 들 정도로 그의 강연은 깊은 감동이었다. 이어진 뒤풀이 자리에서 그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가졌고 비록 미약한 글로라도 연대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저녁을 겸한 술자리에서 역시 이야기 주제는 지난 대선이었다. 마침 대선 기간 중에 소위 ‘박근혜 출산 그림’으로 논란을 일으켰고 그로 인해 새누리당으로부터 고발까지 당한 홍성담 형님도 함께 한 자리였다. 특유의 유머와 해학으로 한 바탕 눈물이 나도록 즐겁게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당연히 무거운 편이었다.

감히 한 자리에 앉아있는 것조차 어려운 여러 어르신들의 말씀에 숙연해지기도 하고 힘을 얻기도 한 자리였다. 특히 강정마을 일로 밤낮없이 싸우시는 문규현 신부님의 말씀이 큰 감동이었다. 내게도 한 마디 할 기회가 주어져, 나는 진심으로 광주에 계신 분들에게 죄송하다고 했다. 

  사실 버스를 타고 오며 톨게이트에 걸린 ‘광주’라는 글씨를 보자마자 가슴이 울컥, 하며 눈물을 찔끔 흘렸었다. 도무지 이 도시가 감당하고 있는 절망감이 얼마나 클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절대 다수의 지지를 보낸 그분들이 겪을 집단적인 좌절감에 비하면 나 따위가 혼자 술이나 마시고 푸념하는 것은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짧게 죄송하다고 두어 번 말하면서도 목소리는 떨렸다. 자리에 있던 분들이 박수를 보내주고 내게 와서 권하는 술잔을 받으며 이제 다시는 대선 결과에 대해 절망이니 어쩌니 하는 생각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두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마주친 지리산은 과연, 지리산이었다. 눈에 덮인 골짝과 등성이, 하늘과 맞닿은 능선들을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게 만드는, 그 어떤 말도 허용하지 않는 산이었다. 나는 한 시간 넘게 말없이 지리산을 바라보며 지그시 역사의 무게에 나를 맡겼다. 칼바람 부는 겨울날, 저 골짝을 오르내리다 고혼이 된 우리 현대사의 중음신들을 생각하며.

  해장으로 재첩국을 먹고 섬진강가 매운탕 집에서 점심 겸 이별주를 나누었다. 너무도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 한 일박이일이었다. 지금껏 가슴에 남아있는 지리산의 영상은 어쩌면 그 사람들의 마음이 함께 빚어낸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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