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농협, 미우나 고우나 ‘농민의 이웃사촌’

농촌에 없어선 안 될 쌀과 소금 같은 존재
사회·문화적으로 소외된 농촌의 활력소

  • 입력 2012.12.31 09:27
  • 기자명 어청식 기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농민들의 눈, 손이 되어주는 고마운 존재

▲ 농촌의 농협은행창구 직원이 할머니에게 통장에서 얼마가 들어오고 빠져나갔는지 하나 하나 큰 소리로 설명해주고 있다.

농촌의 모습이 과거 정답고 넉넉한 고향마을의 분위기에서 사람의 흔적이 점차 사라지고 을씨년스러운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다. 산과 들녘은 그대로지만 사람이 없어서다. 1980년 인구 3,700만명 가량 됐을 때 농촌을 지키는 인구는 1,200만명. 지난해 기준으로 농촌을 지키는 인구는 297만명에 불과하다. 남은 297만명의 인구도 대부분 고령의 노인들.

본지는 지난 10월 변모한 농촌의 모습을 특집으로 다루기도 했다. 50대도 농촌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젊은 일꾼인 시대. 고령 노인들만 지키고 있는 농촌에 농협은 그야말로 쌀과 소금 같은 존재다.

“이거 통장에서 얼마 빠져나갔어? 전기요금은 나간겨?” “할머니 전화, 전기요금하고 유선 방송비 나갔구요. 아직 세금은 따로 안 나갔어요” 지역농협 은행창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할머니와 창구 직원의 대화다. 지난해 12월 26일 5일장이 서는 충남 천안시 성환읍 성환농협. 80세는 훌쩍 넘긴 할머니들이 장날에 맞춰 노인수급, 공과금 납부 등을 위해 장사진을 치고 있다.

나이가 들면 눈과 귀가 예전 같지 않은 법. 할머니들은 갈라진 손길로 통장을 농협 창구 직원에게 건넨다. 그 이유는 통장의 글씨가 작아 도무지 읽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를 대신 읽어주는 여직원들은 노인들이 귀까지 어두우니 언뜻 보면 싸우나 싶을 정도로 큰 목소리로 “주민등록증 갖고 오셨어요? 주민등록증!” 반복해서 목에 핏대를 세우기 일쑤다.

지금은 바야흐로 디지털 홍수의 시대다. 스마트 폰과 컴퓨터, 인터넷만 있으면 물건을 사고팔고 돈을 부치고 받고 여간한 일은 모두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도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세대에 한한다.

농협에 마련된 공과금수납기 앞에는 여전히 기계의 사용법을 전혀 몰라 넋 놓고 한없이 바라보는 노인들이 줄지어 서 있다. 농협직원들은 일일이 기계 앞에서 노인들의 공과금 수납을 돕는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이거 먼저 해 드리고 해 드릴게요. 아니요. 이건 필요 없고 이게 영수증이니까 이거 잘 챙기세요.” 큰 목소리로 하나하나 할머니들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다.

공과금수납기 사용은 지난 2008년쯤 은행권에서 대대적으로 도입됐다. 도입 이유는 간단하다. ‘편리함과 효율성’ 때문이다. 고객들은 줄지어 번호표를 뽑고 기다릴 필요 없고 은행 직원들은 수익이 나지 않는 일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농협을 찾는 시골노인들은 기계를 사용하는 것보다 친절한 농협직원이 알아서 챙겨주는 것이 더 절실하다.

성환농협 창구에서 큰 목소리로 노인들의 눈과 손을 대신하고 있는 정종수 씨(35. 농협직원)는 어르신들이 눈과 귀가 어두워져 일하기 힘들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어르신들 상대가 일상적이기 때문에 특별히 힘들고 말고 할 것이 없다”며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한다. 연말, 월말이 겹쳐 어르신들 수급비로 바쁘지만 8년 여간 일해 온 탓인지 이력이 났다는 것이다.

“어르신들과는 소통하기 어려워 일처리가 늦어지고 젊은 사람들은 빠른 업무처리를 원해 진땀 빼는 것이 일쑤”라며 웃어넘긴다.

농협직원도 농민과 함께 농사짓는다고 봐야

▲ 농협의 경제사업소에서는 오며가며 일상적인 대화판이 벌어진다. 차 한잔과 귤을 나눠 먹으며 담소를 즐기는 농민들.

“농협에서 이것저것 외상값 내라고 법적조치 한다고 협박해서 내러 온 참이여” 성환농협 경제사업소에 영농자재비 외상금액을 갚으러 온 박형수 씨(66세. 배, 벼농사)의 농담이다. 농협직원은 “아이고 반장님 왜 그러세요”라며 농담을 넉살좋게 받아 넘기며 커피를 타준다.

물가가 올라 부담이 산더미처럼 커진 영농비. 박 씨는 “올해 농사짓고 마무리 했으니까 외상값 갚고 내년에 또 써야지”라며 영농계획을 설명한다.

곧이어 장년층 부부가 들어온다. 이들 또한 그간 밀린 영농자재 외상값을 갚으러 왔다. 농협직원, 먼저 온 농민, 그리고 부부가 의자에 두런두런 앉아 커피를 마시며 올해 농사를 평가한다.

“올해 태풍 때문에 배가 워낙 떨어져서 말이지. 그나마 배 값이 괜찮아서 다행이여” “아니 근데 여기서 조금만 걸어가면 바로 경기도인데 경기도 쌀값이랑 충청도 쌀값이랑 왜 이렇게 차이 나는겨? 참 억울햐. 품질도 똑같은데 말이여”라며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의 푸념소리가 들려온다.

농협직원은 귤을 꺼내와 가세하고 한창 이야기꽃을 피운다. 성환농협 경제사업소 농약담당 한현호 씨는 “우리 농협직원도 사실상 농민들과 같이 농사짓는다고 봐야한다”고 말한다. 농번기에 언제 어느 약을 칠지 일일이 농민들의 농사에 깊이 관여하고 상담하기 때문이다.

한 씨는 “농번기에는 농민 분들이랑 1시간에서 1시간 반씩 영농 상담하느라 정신없어요. 지자체 보조 사업이나 농협에서 하는 환원사업 같은 것도 다 연계되어 있으니까 영농뿐 아니라 그런 것도 하나하나 안내해야 하니까요”라며 웃는다. 특히 일손이 없어 유난히 바쁜 시기엔 농협직원들이 농약배달을 나서기도 한다.

조합원 박형수 씨는 농협 분위기가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며 칭찬을 한다. 과거에는 직원들이 자기 일 보느라 정신없었지만, 지금은 오며가며 인사도 잘하고 반갑게 맞아주기 때문이란다.

다양한 복지, 공동화된 농촌의 공동체

▲ “하나 둘 다다다” 성환농협 난타 공연팀은 월요일 저녁에 모여 북을 친다. 여성농민들이 북을 치고 이야기판을 한 차례 치르면 스트레스가 해소된다.
▲ 매주 목요일이면 성환농협 지하 대회의실에서 노래교실이 열린다. 신나는 노랫가락에 맞춰 춤을 추고 박수를 치다보면 지친 마음이 달래지고 활력이 생긴다.

“하나 둘 다다다 하나 둘 다다다” 성환농협 지하 대회의실은 북소리로 가득했다. 대여섯 명의 여성농민이 모여 북과 북채를 두 개씩 잡고 북을 치고 있었다. 재작년 운영해오던 풍물패를 대신해 만든 난타 공연팀. 이들은 매주 월요일 저녁마다 모여 1시간에서 1시간 반 정도 난타연습을 한다. 텅 빈 농촌은 또래의 사람들과 어울릴 일이 거의 없다. 사회·문화적으로 사람이 즐길 거리도 매우 한정적이고 심지어 산부인과도 없어 원정출산을 해야 하는 경우마저 있다.

특히 가사노동과 농번기 노동으로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여성농민들은 문화공간이 빈약한 농촌에서 취미생활을 하기도 힘들고 사람들과 어울릴 공간을 찾기도 어렵다. 당장 영화 한편을 보려 해도 한 시간 이상 차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 50~60대를 접어든 여성들은 우울증에 빠지기 쉽다.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를 하느라 자신의 삶을 돌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농촌을 지키는 여성농민은 이에 더해 농업노동까지 짊어져야 한다. 흔히 농촌을 넉넉한 시간적 여유가 있는 공간으로 비추기 일쑤지만, 여성농민들에게는 바쁜 일상의 연속이다. 그러다보면 내가 무얼 위해 사는지도 까먹게 되고 자존감이 한없이 일그러지기 마련이다.

이런 처지에 놓인 여성농민들에게 농협의 취미·복지사업은 사람 사는 맛을 더해준다. 한창 북치는 것에 열중하던 허금숙(55세. 배농사)씨는 “여럿이 모여 수다 떨고 북을 힘껏 치다보면 스트레스가 다 풀린다”고 웃는다. 허 씨는 이밖에도 농협에서 하는 산악회와 노래교실에도 참여한다. 스트레스 풀기엔 여럿이 좋아하는 노래를 목청껏 부르는 것만큼 좋은 것도 없다는 이유에서다.

성환농협의 노래교실은 100명 가까이 참여할 정도로 지역에선 큰 인기다. 특히 또래의 여성들끼리 모여 남편, 시집 이야기 하면서 서로 고충을 털어놓고 위로를 받는 것이 이들의 삶의 질 향상에 큰 보탬이 되기 때문이다. 노래교실 강사가 우렁찬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재미있는 농담을 한다. 서울구경을 부르며 “하하하 더 크게 웃어요 더 크게”라며 활기를 불어 넣어준다. 여성농민들은 남편과 시집살이, 자식 뒷바라지, 농사일에 치인 일상을 잠시나마 잊고 마냥 박수를 치고 노래를 따라 부른다.

성환농협 박윤분 복지과장은 “난타 공연은 이제 시작한지 1년 반 정도 돼서 공연을 딱 두 번밖에 못했다. 보통 지역에 행사가 있으면 식전행사로 공연을 한다”고 전했다. 이밖에도 이 주부모임은 고기와 생선을 사들고 무의탁 어르신들을 매월 찾아가 집안일을 해준다. 단순히 즐기는 것을 넘어서 지역사회 기여와 나눔의 의미를 더하기 위해서다.

허씨는 “농촌이 고령화된 어른들이 많아지면서 사람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 많아졌지만, 사람이 없어 큰 일”이라며 걱정한다.

박윤분 과장은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복지사업과 겹치지 않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사업을 하고 있다. 내년에는 다문화가정 대학도 개설할 예정이고, 주부대학도 더 활성화할 것”이라고 전했다.

비료값 담합, 농약값 담합, 잇따른 임직원의 배임 및 횡령사건으로 얼룩져 비난을 받기도 하는 농협이지만, 농협의 역할은 신용사업과 경제 사업에 한정돼 있지 않다. 고령화된 농촌의 이웃이자, 사람이 모일 수 있는 넓고 깨끗한 공간이며, 취미와 나눔의 의미를 더하는 곳. 오늘날 농촌의 파수꾼 농협의 모습이다. <어청식 기자>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