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이제 한글 쓸 줄 안다”

강진군 할머니들의 한글 배우기

  • 입력 2012.12.30 22:15
  • 기자명 임영수(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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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무지랭이 촌부에게 글을 쓰라고 하니 무엇을 써야할지 막막하다. 암울한 현실 속에서 허리 굽어지게 일해도 얻어지는 것 없는 농부들의 이야기를 써볼까 했지만 올 한해 어려웠던 이야기는 접어두고, 우리 강진군 농민회 자랑을 해보려 한다.

아직도 시골에는 한글을 깨우치지 못한 할머니들이 많이 있다. 배고팠던 시절, 돈 버느라 일터에 나가느라 살림 챙기기에만 바빴던 할머니들은 배움의 기회를 잃었다.

어려서는 ‘여자가 무슨 글을 배우냐’는 어른들의 타박도 글을 접하기 힘들게 했다. 시집와서는 자식들 먹여 살리느라 본인들의 안위는 돌보지도 못한 채, 평생을 눈 뜬 장님으로 살아야 했다고 한다. 그분들이 바로 우리네 어머니들이다.

늦게나마 이런 할머니들을 위해 강진군농민회와 강진군청은 ‘여성한글학교’를 기획했다. 가나다라부터 할머니들의 눈높이에 맞춰 한글교육을 하는 맞춤형 서비스 ‘찾아가는 여성한글학교’가 바로 그것이다.

비록 농민회와 관이 주도해 만든 임시학교지만 할머니들은 “나도 학교에 다닌다”며 기뻐하고 “이제 내 이름 정도는 쓸 줄 안다”고 자랑을 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 뿌듯함이 밀려온다. 할머니들의 읽지 못하는 설움을 옆에서 느껴왔기에 그 기쁨은 더하다. 어떤 할머니는 글씨를 모른다고 구박한 할아버지한테 “이제는 나도 안다”고 말을 하는 것을 보았는데, 이제는 얼마나 통쾌 하실까.

할머니들은 이제 한글을 막 깨우친 어린 아이들처럼 거리에 보이는 글씨마다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읽으면서 한참을 흡족해한다. “저건 뭐시여. 야... 약국, 이것은 병원!” 옆에서 볼 때 웃음이 비실비실 나오지만 할머니들의 당당한 모습이 보기 좋다. 할머니들은 글을 배워 가장 좋은 점은 면사무소를 가도 농협을 가도 당당하게 갈 수 있고, 손주들에게 편지도 쓸 수 있어 기쁘다고 한다.

여성한글학교는 한글 공부뿐만 아니라, 할머니들이 어렸을 때 학교를 다니며 해보지 못했던 다양한 활동들도 하고 있다. 봄이면 소풍을 가고 가을이면 운동회를 하는데, 젊은이들 못지  않은 할머니들의 힘과 열정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 어떤 운동회 보다 열의가 넘친다.

공굴리기, 이어달리기, 줄다리기, 고무신 멀리 벗어 던지기, 사탕 먹기 등을 하며 이 날만큼은 동심으로 돌아가 본다. 운동회에는 여러 동네 어르신들과 많은 사람들이 모여 매년 장사진을 이룰 만큼 인기도 많다. 나이는 들었을지언정 그 속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에너지가 방출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도시에 살고 있는 할머니의 자녀들은 자신도 못 한일을 지역 농민회에서 해주는 것에 대해 고맙고 미안한마음을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도 일주일에 두 번씩 4시간 진행되는 한글학교에 시간을 내지 못하고 돈을 벌기위해 일을 하는 할머니들도 많아 아쉬운 점이 많다. 어찌됐건 5년이라는 시간동안 찾아가는 여성한글학교가 우리지역의 자랑거리가 되고 다른 지역에도 소문이 많이 났다.

흐르는 세월 속에 배움이란 것이 별것도 아닌 것 같지만 알고 사는 것과 모르고 사는 것은 할머니들에게 대단한 자부심이 되고 한풀이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지역의 좋은 사업이 다른 지역에도 멀리멀리 퍼져나가 소외된 농민을 깨우고 가슴에 맺힌 한을 푸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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