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들

  • 입력 2012.12.24 10:16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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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선 다음 날, 하루 종일 멍하게 지내다가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아침에 눈을 뜨고도 자꾸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 애를 먹었다. 전날 밤에 본 게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헛갈리기도 했다. 눈을 뜬 게 아직 어두운 여섯 시였다.

텔레비전을 켜서 다시 확인을 하고 싶었지만 아내와 아들이 곤히 자는 시간에 그럴 수도 없었다. 분명 누가 대통령이 확실하다는 뉴스를 보고나서 남은 소주를 마시고 잠이 들었는데도, 그 사이에 바뀌었을지 모른다는 기대가 새록새록 피어올랐다. 결국 참지 못하고 텔레비전을 켰다. 화면이 나오기까지 몇 초 동안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러나 아, 물결치는 붉은 색들. 자막에는 괴로운 숫자가 찍혀있었다. 

  사실 투표를 하고 시골집에서 군불이나 때고 빌려온 책을 읽을 생각이었다. 박근혜의 당선을 각오했기에 별 기대가 없었다. 그런데 투표율이 심상치 않게 올라가는 것을 보며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길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은 세 시, 네 시가 되자 점차 확신 쪽으로 기울어갔다. 다섯 시가 되자, 지인들로부터 속속 문자가 들어왔다. 승리가 확실하다는 내용부터 구체적인 출구조사 수치까지 알려오기도 했다. 치솟는 투표율과 문자들은 김칫국을 마셔도 좋다는 독려처럼 달콤했다.

나는 더 참지 못하고 차를 몰아 시내의 아이들 집으로 달렸다. 시골집에서 박근혜를 지지하는 부모님과 함께 개표방송을 보기에는 마음이 버성겼고 마음껏 환호성을 지를 수도 없어서였다. 차에서 치킨집에 주문을 하고 맥주와 소주를 샀다. 축포를 터뜨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집에 들어서자, 아내와 아이들도 몹시 흥분해 있었다.

누구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어린 막내까지 삼남매 모두 정권이 교체되길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다섯 식구가 한꺼번에 함성을 지르기 위해 목까지 가다듬었는데 이럴 수가, 출구조사 결과는 배신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 소주에 맥주를 타 마시며 올해 수능 시험을 본 큰 애와 잔을 부딪치기도 했다.  

  선거 다음날인 오늘 저녁이 다 되도록 그 누구도 전화를 걸거나 문자를 보내오지 않았다. 더러 울분을 터뜨리는 연락이 올 것도 같은데 고요한 침묵이었다. 아마도 모두들 멘붕이라는 걸 겪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말도 하기 싫어 아침도 거른 채 이불 속에서 빈둥대었다. 어찌 생각하면 그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으니, 투표율과 기대 섞인 전망들에 깜박 속아서 흥분한 것뿐이었다. 그래도 충격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끔찍했던 지난 오년이 떠오르며 한숨만 땅이 꺼지게 나왔다.

  다섯 시가 넘어서 문자 하나가 들어왔다. 서울에서 중학교 선생을 하는 친구였다. ‘혼자 술 한 잔 한다. 또 다시 오년을 기다려야 하다니. 그럼 우리도 오십이 넘겠구나.’ 과학 선생답게 여간해서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는 친구가 보낸 문자치곤 꽤나 감상적이었다.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마실 때도 소주 한 병을 넘기지 못하는 놈인데 홀로 술병을 땄다면 어지간히 마음이 괴로웠던 모양이었다.

짧은 답장을 보내주고 났을 때, 전화가 울렸다. 이번에는 멀리 경상도 시골로 낙향한 대학 선배이자 시인이었다. 다짜고짜 신경림의 시집 ‘쓰러진 자의 꿈’을 아느냐고 물었다. 이미 목소리에는 취기가 묻어나고 있었다. 어찌 모르겠냐고 했더니 자신은 지금 그 시집을 읽으며 울고 있단다. 그러더니 시집에 들어있는 시 몇 구절을 읊다가 그냥 끊어버리고 말았다. 어찌 모르랴.

가녀린 시인의 감성으로 오늘 하루를 온전히 견뎌내기 어렵다는 것을. 선배는 괴로워 술을 마셨고 책꽂이에서 오래 전에 나온 그 시집이 눈에 띄었을 것이다. 제목을 보는 순간 마음이 울컥, 했을 것이고 이내 울음이 되어 터지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마지막으로 걸려온 전화는 시민캠프에 직접 들어가서 자원봉사를 했던 선배였다. 놀랍게도 두 달 일정으로 절에 들어간다는 거였다. 아예 휴대폰도 없이 간다며 한 동안 연락이 되지 않을 거라고 했다. 선거에 대한 반응들이 모두 우울하기만 하다. 하지만 나는 술을 줄이겠다는 갸륵한 결심을 먼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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