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농업에 헌신한 운동가 - 원주의 이진선

  • 입력 2012.12.24 09:59
  • 기자명 최용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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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군의 마음으로 우직하게 밀고 온 생명농업, 이진선 선생은 현재도 두레생협의 생산자 회장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원주는 우리 농민운동사에서 큰 의미를 지닌 곳이다. 민주화의 성지라고도 불리는 원주를 생각하면 먼저 떠오르는 두 사람이 있다. 장일순과 지학순이다. 원주의 운동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성과를 내고 있는 한살림운동이나 협동조합운동에 두 사람이 끼친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정의구현사제단과 한살림이 태동한 곳이 원주다. 민주화운동이나 농민운동의 한계에 대해 고민하고 생명이라는 화두를 들고 나온 곳 역시 두 사람을 중심으로 김지하, 박재일 등 소위 ‘원주 그룹’이었다.

물론 원주의 운동이 명망가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초창기부터 지속적으로 함께 한 많은 운동가들이 있고 오늘 소개할 이진선 선생 역시 그러하다. 현재도 두레생협의 생산자회장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그의 삶을 따라가 본다.

가톨릭과의 깊은 인연

이진선이 살고 있는 원주시 호저면 광격리, 지금은 다수 주민들이 유기농업을 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이진선은 1952년에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다. 우리 나이로 올해 환갑, 한 차례 암 수술로 건강이 전과 같지 않다고 하는데도 여전히 활력이 넘쳤다. 워낙 맡고 있는 일이 많고 농사 규모도 커서 몸이 편할 새가 없는 듯했다.

이진선 일가가 호저면에 자리 잡은 것은 일제강점기 때였다. 할아버지가 이 일대에서 처음으로 담배 농사를 시작했는데 한동안 담배는 꽤 고소득 작물이었다. 한 해 농사를 지으면 논 몇 마지기를 살 수 있을 정도였다. 담배 농사가 일대로 퍼져나가면서 상당수 주민들이 담배를 경작하는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그 시절이 다 그랬듯 가난하긴 했지만 끼니를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정규 학교는 오래 다니지 못했다. 가톨릭과의 만남은 운명적이었다. 진즉에 가톨릭에 입교한 집안 덕으로 모태신앙이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니며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작은 아버지는 신부님이었고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신도회장을 했다. 이진선 자신도 오랫동안 교구회장을 지냈다.

가톨릭 원주교구가 전국적인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지학순 주교가 원주 교구장으로 부임한 이후다. 유신을 반대하여 무려 15년의 형을 받은 유명한 사건 이전에도 원주교구는 농민들을 위한 사업을 해나갔다. 그런 반정부적인 분위기와 농민들과 함께 하려는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청년 이진선을 운동으로 이끌었다.

“72년에 대단한 홍수가 났어요. 수십만의 수재민이 발생하고 농경지가 잠겼지요. 지역 차원에서 대책을 세워야한다는 의논들이 모아지면서 지학순 주교가 국제사회에 호소를 했어요. 그에 독일 쪽에서 응답이 왔고 꽤 큰 액수를 지원했어요. 그 기금을 바탕으로 원주교구재해대책사업위원회가 만들어졌어요.”

이 기금은 단순한 구휼사업을 넘어 마을단위의 공동체운동과 자립, 협동조합운동을 위해 투입되었다. 이에 힘입어 곳곳에서 신용협동조합이 탄생하게 되었다. 농민들을 교육하고 자립하는 계기로 삼은 신협운동에 이진선은 적극 결합하였다.

그가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설립한 ‘원성영광신협’은 당시 만들어졌던 신협들 대부분이 사라진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다. 원주에서 가톨릭농민회가 정식으로 창립된 것은 1976년이었다. 창립회원으로 참가한 이진선은 79년부터 총무를 맡으면서 투쟁의 현장에 빠지지 않고 달려갔다. 현장뿐 아니라 분회 모임과 같은 조직 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그래도 그 때는 힘든 줄 몰랐다. 원주 교구는 워낙 넒은 지역을 포괄하고 있었다. 강원도를 넘어 충북의 제천, 충주, 음성이 모두 관할이었다.

“그 때는 참, 농민들이 서로 인간적이었던 것 같아요. 보통 분회 모임에 가면 일박이일이 기본이었어요. 차가 없으니까 걸어가다가 버스가 오면 타고, 또 걷고 하는 식으로 찾아가는 거예요. 농사철에 집이 비어있으면 밭으로 가요. 어디 논밭이 있는지도 다 아니까. 가서 같이 일하고 저녁에 술 마시면서 이야기하고, 다음 날 또 그렇게 걸어서 다른 분회로 가는 거지요.”

그렇게 며칠씩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제천이나 단양, 삼척, 정선, 횡성까지 다니며 조직하고 교육을 했다. 총무 일을 본 10여 년 동안 일주일에 집에 들어온 게 한두 차례일 정도였다. 경찰이나 관에서 늘 서너 명씩 감시가 붙어있던 세월이었다. 지금은 마시지 않지만 그때만 해도 두주불사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형사와 큰 컵에 따라서 서로 마시다가 형사가 술에 취해 떨어지면 따돌리고 집을 나선 적도 있었다. 그래도 참으로 신나는 시절이었다.

“옛날에는 힘으로 막으니까, 오히려 더 싸울 마음이 들고 사기도 올랐지. 충주댐이 돼서 주민들과 투쟁할 때, 전두환 때니까 살벌할 때죠. 그래도 겁 안 내고 모여서 싸웠어요. 결국 보상도 좀 더 받고 그랬지. 지금은 다 돈으로 억누르는 세상이 되어서 투쟁이 그때보다 더 힘들죠. ”

이진선은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대상으로 사찰번호까지 있었지만, 실제로 구속된 적은 없었다. 경찰서에는 수도 없이 갔지만 구속까지 가지 않았던 것은 무엇보다 원주의 막강한 힘 덕분이었다. 교회가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고 운동권의 역량이 다른 지역에 비해 컸다.

갈등과 새로운 길

이진선이 활발하게 움직이던 80년대는 그야말로 쉴 새 없이 투쟁이 이어졌다. 음성에서 열린 부당농지세 시정 농민대회에는 무려 1,500여 명의 농민들이 모여 함성이 드높았다. 이어진 농협조합장 직선을 위한 백만인 서명운동과 농협민주화운동으로 이진선은 집에 붙어있을 새가 없었다. 농사는 틈틈이 짬을 내어 하는 수밖에 없었다.

소몰이 투쟁과 외국농축산물 수입반대운동, 6월 항쟁에서도 이진선은 특유의 투쟁력으로 늘 앞장서서 싸웠다. “전경들이 막고 최루탄을 쏘고 하면 나는 더 힘이 나더라고. 한 번은 수백 명이 꽹과리 치고 시위를 벌이는데 한 4킬로를 가는데도 막지를 않아요. 그러니까 오히려 힘이 빠져요. 사실, 농민들은 응어리진 한이 있어서 맞닥뜨려 싸우고 울분을 폭발시키는 그런 게 있어야 돼요.”

교육을 해도, 회의를 해도 열기가 넘치고 신이 나던 시절이었다. 다들 어려웠지만 오히려 지금보다 여유로웠던 것 같다. 며칠씩 교육을 가고 회의만 해도 일박이일이었는데, 요즘은 시간 맞추어서 쫓기듯이 하는 게 안타깝다. 돈이 없어서 가톨릭센터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잠은 성당 옆 여관에서 주로 자며 회의를 하곤 했다. 결국 여관 주인까지 회원으로 끌어들여 공짜 잠을 잤다는 얘기를 하며 이진선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농민회 건설

90년대 들어 전국농민회가 결성되고 가농은 질적인 변화를 꾀하게 된다. 땅을 살리고 지속가능한 생명농업의 길이었다. 이진선은 그에 찬동하여 유기농업을 시작했지만 쉽지 않은 길이었다. 제초제를 칠 수 없으니까, 날마다 잡초와의 싸움이었다. 몸은 몇 배로 힘든데 현장에서 싸울 때처럼 흥이 나지 않았다.

주위에서 농약과 비료를 쓰지 않는 그를 두고 미친놈이라는 말이 들려오기도 했다. 전에는 빨갱이 소리를 듣다가 다시 미친놈 소리까지 듣게 된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생명농업이라는 것을 농민회원들에게 충분히 인식시키지 못한 채로 시작된 것 같아요. 유기농이 참 어려운 건데, 결국 버티지 못한 회원들이 많이 떨어져나갔어요. 그렇다고 전농으로 가지도 못하고, 많은 손실이 있던 게 사실이죠. 나도 초기에는 지겹더라고요. 유기농이라는 게.”

그래도 농군의 마음으로 우직하게 밀고 갈 수밖에 없었다. 봄이 오면 씨 뿌리고 또 땅에 매달렸다. 원주 생협이 만들어지면서 조금씩 활기가 돌고 유기농에 대한 자신감도 생겨났다.

현재 그는 9,000 평의 논농사와 3,000평의 복숭아 농사를 유기농으로 하고 있다. 농약과 비료를 전혀 쓰지 않고 과수원을 한다는 게 놀라웠다. 인터뷰를 마치고 그의 과수원으로 갔다. 과수원에는 군데군데 빈 곳이 많이 눈에 띄었다. 거듭된 겨울 추위로 고사한 나무들이 많다고 했다.

“유기농으로 하면 복숭이 수명이 12년 정도밖에 안 돼요. 나무좀이라는 벌레가 파고 들어가서 고사시키는데 농약을 치지 않으니까, 나무가 죽어가는 거죠. 더구나 동해를 입어서 약해진 나무들은 더 쉽게 공격을 받아요.”

보통 복숭아나무의 절반 정도 되는 수명을 감수하고 유기농을 실천하는 그의 뚝심이 대단해 보였다. 과수원 바로 곁에는 부모의 묘소가 있었다. 잘 다듬어진 선영에 증조 대부터 모셨다고 했다.

그런데 선친의 묘소 앞이 반들반들했다. 하도 자주 와서 앉아있다 보니 그 자리가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그에게 아버지는 각별한 존재였다. 많은 대화를 나눈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어도 그에게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다고 한다. 나이가 들고 큰 병마도 겪고 나자 아버지의 존재가 더욱 생각나 자주 오게 된다. 혼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고 답답한 게 있으면 대답 없는 무덤을 향해 묻기도 한다. 그렇게 한참 있다 가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진선이 다시 이끈 곳은 도정공장이었다. 3년 전에 문을 열었다는 도정공장은 바쁘게 기계가 돌아가며 포장된 쌀 포대를 쏟아내고 있었다. “이 공장이 친환경 쌀만 도정하고 있는데, 순전히 농민들이 투자하여 설립한 겁니다. 다른 데서 도정을 하면 혹시 일반 쌀이 섞일 수 있으니까 소비자들이 친환경 쌀만 전문으로 도정하길 원해요. 생산자들이 벼 수매가에서 10%씩 떼어서 이 공장을 설립한 게 참 뿌듯한 일입니다.”

그는 도정공장에 대해 꽤나 자부심을 가진 듯했다. 이진선은 소비자 회원 10만 명을 가진 두레 생협의 생산자회 회장이다. 생산자회원은 500여 명이다. 항생제를 쓰지 않는 축산 농민들도 생협에 결합했다.

소비자는 건강한 먹을거리를 보장받고 생산자들은 제값을 받는 생협운동에 대한 그의 믿음과 열정은 대단했다. 이미 규모가 상당히 커져서 완전히 자리를 잡은 듯했다. 그가 속한 생협은 규모 면에서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 정도인데 전국적으로 확대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농사가 편하다

그는 농사가 편하다고 했다. 가끔 서울에 가면 도무지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는 생각이 든단다. 슬하에 둔 남매 중에 아들은 함께 살며 같은 길을 가고 있다. 이미 두 손자를 둔 그는 더없이 바쁘면서도 편안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언뜻 지나가는 말처럼, 몇 년 정도 시간을 투자하여 새로운 지역에서 운동 기반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에게서 여전히 번뜩이는 활동가, 조직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감탄스러웠다.

생명농업과 생협운동에 매진하면서도 그는 현장에 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멕시코 칸쿤에서 열렸던 WTO반대 시위에 참가하여 이경해 열사가 눈앞에서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기도 했다.

암 수술 후에 기억력이 많이 떨어졌다고 했지만, 수십 년 전에 있었던 일의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곤 했다. 그리고 원주의 큰 어른이었던 장일순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젊은 시절에 그분에게 들었던 말 중에 기억나는 게 있어요. 세상을 다스리는 게 왕인데, 사람을 먹여 살리는 농민들 하나하나가 바로 왕이다, 라는 말이 상당히 와 닿았어요. 농사와 생협운동이 그리스도의 길이다, 그런 말도 그렇고. 가까이 살기는 했지만 사실 좀 어려운 분이었죠.”

그가 다시 데리고 간 곳은 근동에서 소문난 메밀국수집이었다. 손님이 가득 찬 식당에서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을 많이 들었다. 아주 재미있게 이야기를 하는 분이었다. 건강이 많이 회복되어 술도 조금씩 다시 드시고 담배도 피웠다. 소설가의 직감으로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분임을 알 수 있었지만, 오후에도 여러 일정이 잡혀 있어 아쉬운 발길을 돌려야 했다.

여전히 현역인 선생의 열정이 고스란히 가슴으로 전해진 만남이었다. .

 <글·소설가 최용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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