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레의 시민

  • 입력 2012.12.17 08:38
  • 기자명 한국농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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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여름 서울 시립미술관에서 로댕전을 열었던 적이 있었다. 촌놈도 예술감성을 키워보려 작품감상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로댕하면 생각나는 것은 ‘생각하는 사람“이다. ‘지옥문’이라는 작품 속에  설치해 지옥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깊은 고뇌에 빠진 모습을 보여준다.

로댕의 두 번째 대표작을 꼽으라 하면 ‘칼레의 시민’을 든다. ‘생각하는 사람’과 ‘칼레의 시민’을 보면 두 작품 모두 인간의 깊은 고뇌를 엿볼 수 있도록 표현했다. 좀 다른 것이 ‘생각하는 사람’이 종교적으로 인간근원에 대해 고뇌하는 모습을 표현 했다면 칼레의 시민은 역사적 사실과 실재하는 위협 앞에서 인간실제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 본다.

이승에서 죄를 저지른 인간들이 목에 쇠줄을 걸고 지옥문을 들어간다는 원죄설을 설정하고, 나약한 인간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도록 표현한 ‘생각하는 사람’은 다분히 종교적이다. ‘칼레의 시민’은 영국과 프랑스의 100년 전쟁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 프랑스의 칼레라는 작은 도시가 항복하지 않고 맹렬히 저항하였으나 영국의 에드워드3세에 의해 결국 함락 당하고 말았다. 에드워드3세는 칼레의 모든 시민을 죽이려고 했다.

칼레의 시민들은 불안과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때 칼레의 유지격인 여섯 사람이 스스로 자신들의 목숨을 내놓는 조건으로 칼레시민들은 살려달라는 청원을 한다. 에드워드3세는 이를 받아들인다는 이야기다. 그때  칼레의 여섯 유지들이 바로 ‘칼레의 시민’이라는 로댕의 작품이 된 것이다.

아마 여느 작가 같았으면 여섯 영웅의 의연하고 늠름한 모습을 조각상에 담았겠지만 로댕은 그러지 않았다. 깊은 시름과 고뇌와 괴로움과 공포를 조각상 안에 표현해 낸 것이다. 공포에 질린 칼레의 영웅들과 시민들의 수평적 관계를 부각하는 새로운 시도를 로댕은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내 목숨을 바치겠다는 그래서 칼레를 구하겠다는 지도자들의 스스로의 결단은 말로는 많이 했고 들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실제 상황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내어 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이 상황이 만들어진 사실이라는 이야기도 있긴 하다.

대통령선거가 종반으로 치닫고 있다. 여고 야고 할 것 없이 국민들을 현혹하는 말들이 난무하고 있다. 그야말로 公約이 空約으로 변할 수밖에 없는 것들도 따지고 보면 수두룩하다. 그런 허무맹랑한 말로 국민들은 그들에게 권력을  위임해 준다. 그러나 그 권력은 국민들의 등을 쳐 거리로 내몰고,  일자리를 빼앗고, 목숨을 앗아간다, 결국 최후의 철탑에 저항의 둥지를 틀 수 밖에 없다.

일일이 적시 하지 않아도 현재 대통령이 되려 하는 유력후보들은 이미 이사회의 소위지도급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과연 ‘칼레의 시민’ 앞에서 그들의 고뇌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국민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대통령, 국민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과 동일시 할 수 있는 대통령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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