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 건배를

  • 입력 2012.11.12 09:55
  • 기자명 최용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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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가 수능 시험을 치르는 날, 전날 술을 꽤 마시고 잤는데도 다섯 시 전에 잠이 깨었다. 아직 동이 트려면 한참을 더 있어야 하는데 정신은 말갛게 개어 그저 누워있을 수가 없다. 밖으로 나와 떨면서 담배 한 대를 끄고 아내를 깨웠다. 아내 역시 깊이 잠들지 못했는지 금세 눈을 비비고 일어난다. 밥을 안치고 도시락 쌀 준비를 한다. 그럭저럭 아이가 깨워달라던 여섯 시가 되었다. 방으로 들어가 보니 벌써 일어나 있다. 평소에는 꼭 깨워야 일어나더니 저도 꽤 긴장이 되었나보다.

아침으로 죽을 먹겠다더니 그나마 몇 술 뜨지 않는다. 애써 밝은 표정을 짓는 아이의 속내가 보이는 듯하다. 무려 십이 년 동안 학교를 다니며 공부한 게 오늘 하루로 결정되는 말도 안 되는 교육 시스템에 잠시 울화가 치민다. 일곱 시 반에 아이를 태우고 고사장으로 향했다. 출근시간이 늦춰져서 그런지 거리는 한가로웠다. 교문 앞에는 경찰관들과 응원을 온 후배 아이들과 무언가를 나누어주는 장사치들까지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등을 한 번 두드려주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이를 들여보냈다. 교문을 붙잡고 기도를 하는 어느 어머니도 보였다.

내가 대학시험을 치를 때, 집에서 몇 시간이나 떨어진 곳에서 자취를 하고 있던 방에 어머니가 왔다.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온 어머니가 가방에서 꺼낸 것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입었던 배냇저고리였다. 바래고 얼룩도 남아있는 조그만 옷이 무슨 부적이라도 되는 양 일부러 가지고 온 것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런 식의 미신을 믿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정성을 뿌리칠 수 없어 그 옷을 가슴에 품고 시험을 보았다. 그리고 지금도 불가사의하게 생각하는 일이 벌어졌다.

고등학교 시절에 나는 문학에 빠져 시집이나 소설책을 주로 보았을 뿐 교과서에는 거의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았었다. 당연히 대학을 가기는 어려울리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모의고사 때마다 대학에 갈 만한 점수를 얻지 못했다. 꼭 가고 싶은 대학이 있긴 했다. 당시에 유일하게 문예창작과가 있던 한 학교였다. 시험 결과는 스스로 놀랄 정도였다. 배냇저고리의 힘이었는지, 원하는 대학을 충분히 갈 수 있는 점수가 나왔던 것이다. 몰라서 찍은 문제들이 줄줄이 정답으로 나오는, 희한한 사태였다. 어쨌든 적어도 입시고사에서는 억세게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었다.

딸아이는 나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열심히 공부를 했다. 곁에서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였는데 아이 말로는 저보다 더 열심히 하는 애들도 많다는 거였다. 그래서 그런지 상위권에 들지 못하는 때도 꽤 있었다. 나는 내게 떨어졌던 이상한 행운이 아이에게도 왔으면 하는 기대를 저버리지 못하고 종일 마음을 졸였다. 좋은 대학을 가거나 그런 걸 염두에 둔 건 아니었다. 나는 그냥 등록금도 싸고 쉽게 들어갈 수 있는, 집에서 가까운 대학에 들어갔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 다만 실망스런 결과가 나오면 아이가 느낄 절망감이나 좌절이 두려웠다. 길었던 시간이 흘러 네 시가 되었다. 아내와 교문에서 한 시간 넘게 기다려 나오는 아이를 맞았다. 얼굴 표정이 어떨까, 잔뜩 긴장했는데 생글생글 웃으며 나온다. 나를 보더니 달려와서 품에 안긴다. 다 큰 딸을 안으면 참 기분이 좋다. 아이는 후련하다는 말을 연발하며 배가 고프다고 난리다. 도시락을 보니 밥을 반 넘게 남겼다. 아침과 점심을 거의 굶은 것이었다.

오랜만에 고기를 먹으러 가자고 했더니, 겨우 칼국수가 먹고 싶단다. 칼국수 집에서 아이는 쉼 없이 조잘거리며 시험 이야기를 했다. 그 해방감에 나도 감염되는 것 같았다. 술 한 잔을 아니할 수 없는데, 아무리 술을 좋아해도 칼국수에 먹을 수는 없었다. 메뉴를 보니 그나마 만두가 있다. 만두 한 접시와 맥주를 시켰다. 아이와 아내에게 한 잔씩을 따르고 셋이 건배를 했다. 아이는 단번에 잔을 비웠다. 술 마시는 품이 친구들과는 더러 마셔본 듯하다. 이제 가끔 딸아이와 잔을 기울이는 아빠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술맛이 특별했던 수능날이었다. 대선! 여성농업인은 정책대상 속에 포함이나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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