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만난 농민] 농촌공동체에 희망을 거는 농민

겨울 표고버섯처럼 단단한 삶 일궈

  • 입력 2012.11.12 09:26
  • 기자명 한승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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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도 같이 짓고 판매도 같이 하고 문화도 공유하고, 농촌의 미래는 협동에 달렸어. 협동."

1998년 12월 26일. 날짜까지 기억했다. 전남 장흥에서 표고버섯을 재배하는 박형대(장흥읍 월평마을, 43)씨는 농사를 짓기 위해 장흥에 내려온 14년 전 그날을 똑똑히 기억했다. “원래 고향은 보성이여. 댐 건설로 마을이 수몰됐어. 대학 졸업 후 농민회 추천으로 장흥에 내려왔는데 연고도 없고, 살 곳도 없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첫 발을 내딛었으니 그 날짜를 잊어버릴 수 있간디.”

▲ 박형대씨가 지난 6일 전남 광주에 위치한 전농 광주전남연맹 사무실에서 상근자와 일정을 논의하고 있다.
정말 아무것도 없어서 장흥 정착 원년엔 아는 형님 집에서 먹고 자며 일을 배웠다. 1년여에 걸친 수습(?)기간을 보낸 뒤 현재의 터전이 된 보금자리와 경작시설을 마련해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가 선택한 작물은 표고버섯. 겨울철에도 온화한 날씨를 보이는 장흥 지역은 표고버섯 생산지로서 최적의 자연환경을 갖고 있었다. 다른 지역과는 달리 여타의 난방 시설이 없어도 시설 하우스 재배가 가능했다. 불을 때지 않고 오로지 태양열로만 버섯을 키웠다. 겨울에 난 버섯은 단단하고 품질도 좋아 가격경쟁력도 있었다. 무엇보다 버섯 재배에 필요한 기술이나 물품 등을 아낌없이 지원해주는 마을 형님들의 도움이 든든했다. “객지가면 객지 탄다는 말이 있어. 괄시받고 소외받고, 근데 난 아니여. 마을 형님들이 젊은 사람 자리 잡도록 도와준다고 참 많이 챙겨줬어. 이 분들과 함께 어울려 살면서 일하는 게 진짜 산교육이었고.”

그렇게 키운 농사가 표고버섯 3,300㎡, 벼농사 26,440㎡에 이르렀다. 14년간 농사를 지어오면서 태풍 피해를 입고 폭설로 하우스가 모두 무너져 내리는 상황도 피해갈 순 없었지만 마을 주민들과 함께 극복하며 서로 부대껴왔다. 그러나 최근 농사규모가 많이 줄었다. 장흥산업단지가 작년에 들어서면서 농토가 단지에 편입된 것이다. 애착이 생길 정도로 정든 땅을 떠나야하는 마음은 아쉬움을 넘어 착잡했다. “어쩔 수 있간디. 다시 일어나야지. 내년에 하우스 짓고 다시 시작할텐게. 올해는 농사를 많이 짓지 못했지만 상대적으로 농민회 활동에 시간을 많이 낼 수 있었구만.”

그는 현재 전농 광주전남연맹의 사무처장을 맡고 있다. 지난 6일 그를 만나러 간 곳도 장흥이 아닌 광주광역시에 위치한 도연맹 사무실이었다. 매주 2~3회 정도 장흥과 광주를 오간다는 그는 이날 밤엔 여수행 차량에 몸을 실었다. “농사만 짓고 있으면 맘이 참 편해. 행복하지. 농업을 요즘 말로 하면 ‘힐링’ 직업일거여. 자연에서 농산물을 생산한다는 게 참 고귀한 일이거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민을 멸시하고 경시하고 함부로 대하는 것 보면 고귀한 농업을 가장 천박스러운 직업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드는구먼.”

그는 농민으로 살아오면서 가장 억울하고 서러운 것이 농민으로서 자기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투표권, 선거권, 피선거권, 표현의 자유 등을 누리지만 가장 중요한 노동의 댓가, 내 노동에 대한 댓가를 주장하는 데 남의 결정만 바라봐야 하는 상황이 참으로 역설적이라는 거다. “RPC로 쌀을 가져 간 농민들의 표정이 꼭 성적표를받아들기 전 학생처럼 주눅들어있어. 도마 위에 오른 생선 같기도 하고. 주방장이 맘대로 요리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잖어.”

사무처장으로서 그의 임기는 올해 말까지다. 임기를 마치고 나면 몸과 마음이 ‘힐링’ 되는 농사만 지을 법도 한데, 그는 여전히 더불어 잘 사는 농촌을 꿈꾼다. 비틀린 사회 구조에 맞서 싸우는 것과 동시에 대안사회로서의 농촌공동체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고민하고 있다. 협동보다는 개인화되고, 돈의 이해관계 때문에 분열하고 대립하는 농촌 사회를 여전히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자 함이다. “농촌이 살고 농민들의 효율적인 노동을 위해서라도 공동체로 가야 혀. 농사도 같이 짓고 판매도 같이 하고 문화도 공유하고, 농촌의 미래는 협동에 달렸어. 협동.”

지금껏 해온 일보다 해야 할 일이 더 많이 남은 그의 나이는, 이제 겨우(?) 43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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