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식량위기 속 식량주권 제도화 국가들

헌법에 명시·관련법 정비로 식량주권 내세워
국내 자급률 높이고 보편적 복지 증진 꾀하고

  • 입력 2012.11.05 09:47
  • 기자명 한승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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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거리는 국민의 삶의 질을 유지하고 높이는 데 기초가 된다. 따라서 먹거리에 대한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것은 국가의 기본책무에 해당한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식량위기가 확산되고, 먹거리 위기가 심화되는 상황에서는 국가의 높은 책임성과 적극적인 역할이 더욱 절실하게 요구된다.

식량위기의 시대, 국가 차원에서 헌법에 식량주권 개념을 도입하여 정책을 시행하는 나라들이 점점 생겨나고 있다.

1997년 소농들의 국제적 연대기구인 비아 캄페시나에서 제기한 ‘식량주권’을 도입, 국내의 식량자급률을 높이고 먹거리 보장에 대한 국가의 책임성을 높여 보편적 복지의 길로 나아가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식량안보를 넘어 식량주권의 새 패러다임을 받아들인 나라들의 사례에 주목한 이유다.

 

생산이 소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2000년 이후 전 세계 식량의 총생산량이 총소비량 보다 낮은 식량 부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육류 소비의 증가, 중국·인도 등 신흥 개발도상국들의 곡물소비가 늘어나고 곡물을 사용한 바이오연료의 사용 증가가 소비량 증가의 주요 원인이다. 이로 인한 식량위기는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2007년과 2008년에 발생한 사상 유래 없는 식량가격 폭등은 37개국에서 대규모 유혈사태를 발생시켰다. 식량부족과 가격 폭등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주요 곡물수출국들은 수출을 통제했다.

전 세계 곡물거래의 80~ 90%를 독점하고 있는 5대 메이저 곡물회사의 곡물투기도 제 철 만난 듯 성행하고 있다.

세계식량위기가 심화되면서 먹거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먹거리 공급의 안정성과 질의 안전성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인간의 기본적 권리인 식량, 생명과 직결되는 먹거리의 중요성이 사회적 이슈로 거론됐다.거듭되는 식량위기의 대안 패러다임으로 식량주권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국민들의 먹거리 기본권 보장을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가치로서 식량주권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장경호 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 부소장은 “식량과 먹거리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식량안보에서 식량주권으로의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식량주권, 국민의 삶의 질 향상시켜

식량주권의 제도화는 국민의 먹거리 기본권을 보장함으로써 먹거리의 양극화를 해소하고 먹거리에 따른 건강과 안전의 불평등을 해소함으로써 국민들의 삶의 질을 고르게 향상시킬 수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식량주권에 주목하는 이유다.

현재 국가 차원에서 헌법에 식량주권 개념을 도입하여 정책을 시행하고 있는 나라는 남미에서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에콰도르, 아시아에서는 네팔, 아프리카에서는 말리와 세네갈 등이다. 세계의 식량위기가 남의 나라의 이야기일까?

이들 나라의 식량주권 제도화 사례들을 살펴보자. 

<표 1>. 국가 차원의 식량주권 제도화 사례

국가

식량주권 운동의 뿌리

국가 헌법/법률을 통한 제도화

베네수엘라

볼리바리안 혁명, 차베스 대통령의 통치와 농민조직 및 민중조직의 운동

1999년 볼리바리안 헌법의 305, 306, 307조

2001년 토지법

2008년 식량안보 및 식량주권법

2008년 집약적 농업, 건강에 대한 법

말리

농민조직 CNOP와 NGO와의 협력, 일련의 토론, 논쟁, 지방, 지역, 국가 차원의 포럼의 결과

2006년 통과된 농업집중법에서 식량주권을 주요 원칙으로 함.

볼리비아

농민과 원주민 조직의 노력이 식량주권을 포함시키는데 영향을 줌.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도 식량주권과 비아 캄페시나에 동조.

2009년 헌법 16, 310, 404조에 포함됨.

에콰도르

농민조직이 에콰도르 정부에 식량주권 언어를 제안하는 강력한 전선을 위해 Mesa Agraria 연합 결성

2008년 헌법에 6장과 7장, 281조에 통합됨.

네팔

식량주권을 모든 네팔 소농 단체와 네팔인의 기본적인 권리로 통합하기 위한 전국적인 캠페인 노력

2007년 네팔 중간 헌법 18조와 33조에 포함됨. 18조는 “모든 국민은 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식량주권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음.

니카라과

비아 캄페시나를 비롯하여 식량주권을 지원하는 다양한 농민단체, NGO들이 있음. 농업&산림 연대에 소속된 두 개의 전국 네트워크가 식량주권 의제를 지원하고 있음.

식량주권과 식량권에 관한 몇 개의 전국적 프로그램이 진행중임. 기아 퇴치, 고리대금 퇴치, 식량주권과 삶의 안정 등이 있음.

세네갈

식량주권은 농민단체(CNCR)와 식량과 종자 주권을 위한 서아프리카 연합의 전폭적 지지를 받고 있음.

2004년 세네갈 농업기본법에 식량주권 원칙을 포함시킴.

자료출처: 민중을 위한 식량주권(2009)

(1) 베네수엘라 - 쌀과 옥수수, 돼지고기의 자급 달성

1998년 들어선 차베스 정권은 식량과 농업 시스템의 재구축을 일차적인 목표로 삼고 비아 캄페시나의 ‘식량주권’ 개념을 받아들여 1999년 세계 최초로 자국 헌법에 명시했다.

2001년 토지소유자의 5%가 전체 토지의 75%를 소유하는 한편 토지소유자의 75%가 단 6%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라티푼디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의 토지개혁을 통해 약 270만ha에 달하는 토지가 생산 농지로 전환되었으며 약 18만 가구가 토지 재분배의 혜택을 받았다.

주요 곡물인 쌀과 옥수수, 소비량이 많은 돼지고기의 자급을 달성했으며 식량자급률은 24%가 향상됐다.

지역 산 콩, 빵, 우유, 채소 등 주요 식량을 시장가격의 절반에 판매하는 정부보조 슈퍼마켓인 ‘메르칼’을 통해서 생산자들에게는 안정적인 판로를 제공하는 한편 저소득층에게는 양질의 농산물을 공급하고 있다.

(2) 말리 - 농업기본법 정비

2006년 농민단체와 농민들을 지원하는 NGO들이 전국 및 각 지역단위에서 일련의 토론과 포럼을 거쳤으며 정부 간 협력을 통해 농업기본법을 정비했다.

이 법은 식량권, 남성과 여성의 평등, 가족농 육성, 토지와 자원에 대한 농민의 접근, 국가의 관찰책임, 식량안보 및 식(食) 주권의 실현을 중심내용으로 한다. 농민들의 농지에 대한 종신계약을 보장하며, 공공 및 개인 투자증권, 토지 자원에 대한 평등한 접근, 농민들의 지속가능한 관리를 주요한 기준으로 삼았다.

(3) 에콰도르 - ‘먹거리 및 영양주권 위한 국가자문회의’를 상설기구로 설립

2009년에 식량주권을 위한 헌법을 채택했다. 수개월 동안 정부, 학계, 산업계, 농민단체,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이 토론을 통해 내용을 마련하고 식량주권을 헌법에 명시했다.

토지, 자본, 기술 지원의 접근성 증대, 사회적 경제와 공정 무역의 실현, 다양하고 지속가능한 생산, 소농을 위한 로컬푸드 활성화, 물 사유화 금지, 종자의 보호, 농업노동자의 권리 보호, 여성 농민의 권리 보호 등을 실현하기 위한 식량주권을 실현하고, 에콰도르를 GMO 청정국가로 선언했다.

또한 실행을 감독하기 위해 농민단체, 토착민단체, 중소생산자단체 대표 6명과 행정부 대표 6명으로 구성된 ‘먹거리 및 영양주권을 위한 국가자문회의’를 상설기구로 설립했다.

(4) 인도 - 국가식량보장법 제정

지난해 12월 인도는 선별적 먹거리 복지의 차원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국가식량보장법을 내각에서 통과시켰다.

빈곤선 아래 절대 빈곤층과 차상위 계층에 대한 차등지원으로 이 법이 최종적으로 국회를 통과하게 되면 농촌인구의 75%, 도시인구의 50%, 전체 인구의 62.5%에 해당하는 7억 3천만 명이 정부의 공공배급체계를 통해 식량을 지원 받게 된다.

국가 차원의 식량주권 제도화 사례에서 살펴보듯이 아직은 식량주권 제도화가 일부의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의 몇몇 나라에 편중되어 이뤄지고 있어 구체적인 시행 과정 및 성과는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들 국가의 식량주권 제도화가 국내자급률을 높이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과 국가의 먹거리 보장에 대한 책임성을 높여 보편적 복지의 증진을 꾀하는 있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나라의 식량자급률은 2011년 기준 22.6%다. 사상 최저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사실상 꼴찌다. 자급률이 낮아 우리 국민 먹거리의 4분의 3이상을 해외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정부는 국내자급률을 높이려는 노력 대신 해외농업개발이나 국제곡물조달시스템을 통해 해외에서 식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겠다는 대책만 내놓고 있다.

다시 묻고 싶다. 세계의 식량위기가 남의 나라만의 이야기일까?

<한승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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