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村)년

  • 입력 2012.11.05 09:35
  • 기자명 박은빈 충남 홍성군 홍동면 금평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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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년 전, 도시에서 올빼미생활을 하던 내가 이곳 충남 홍성군 홍동면에 왔을 때에는 한 겨울이었다. 어느덧 봄과 여름을 지나 낙엽이 지는 가을에 서있다. 굳이 정확하게 따지자면 가을과 겨울 사이 길목에 있다. 요즘 낮은 12시간이 안 된다. 해는 아침 6시 30분쯤 일어나고, 게으른 나는 그보다 1시간 후에 일어난다. 어기적어기적 점심 도시락을 챙기고 밖을 나서면 하루가 다르게 입김이 선명해진다. 일터에 거의 다다랐을 때 즈음, 2차선 도로에 콩을 널어놓아 영락없는 1차선이 된 길을 보는데 참 재미있다. 사람만큼이나 자동차가 많은 도시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풍경이기 때문이다. 어느 누가 감히 도로를 점거할 수 있냐는 말이다. 벼 말린다, 콩 말린다 해서 한 달 가까이 1차선 도로였지만, 어느 누구도 인상 찌푸리는 일이 없다.

걸어가는 길에 마주 걸어오는 사람을 만나기는 참 드문 일이지만, 가끔씩 차는 지나가기 마련이다. 장사장님 차, 오도선생님 차, 형일형 차, 루시언니 차. 사람마다 특유의 걸음걸이가 있어서 뒷모습만 보고도 누군지 알 수 있듯이, 흔하디 흔한 흰색 트럭을 누가 운전하는지까지 맞추는 경지에 이르렀다.

요즘은 내년 작부를 짜고 있다. 내가 일하는 곳은 교육농장이다 보니 농업보다는 교육과 자급이 더 중요하다. 어떤 걸 먹을까? 어떤 요리에 도전해볼까? 토양을 위해서는 어떤 작물을 심을까? 어떻게 하면 작물들이 올해보다 건강하게 자랄 수 있을까? 고민하는 중이다. 기르는 작물도 수십 가지가 넘고, 벌을 부르는 꿀풀과 허브와 꽃들까지 그야말로 다양성 그득한 밭이다. 겨울이 짙어질수록 밭일보다 책상일이 더 많아진다. 도시청년들과 농촌을 연결하는 교육, 농촌아이들이 지역에서 진로를 찾아보는 교육에 대해 구상하며 이것저것 정리하다보면 어느새 날이 어둑해진다. 저녁 6시만 되도 저 멀리 보이던 오서산이 어둠에 가린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어서 집으로 돌아가는데, 여전히 바람이 차다.

밤은 참 밤답다. 아주 드물게 집 뒤에 사는 당나귀가 울 때 말고는 고요하고 또 고요하다. 스물네해를 수많은 익명의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살다가 혼자 있으려니 처음에는 어찌나 감옥과 같던지. 깜깜하니 어딜 나갈 수도 없고, 가까이에 또래 친구는 없고 하지만 지금은 기꺼이 홀로 있기를 자청한다. 지그문트 바우만 할아버지가 쓴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을 읽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렇게 밤 9시, 10시만 되면 하품이 삐져나와 잠들어야 한다.

촌(村)에서 농(農)과 촌(村)에 관련한 일을 하며 산다는 건, 계절 따라 하루주기에 따라 사는 거더라. 촌(村)스럽게 맞이하는 겨울에는 내년에 대한 온갖 상상들로 몸도 마음도 역동적이겠지! 카렐 차페크 아저씨가 「원예가의 열두달」이란 책에서 겨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흔히들 겨울에 자연이 휴식을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 자연은 죽음 그 자체에 몰두해 있는 것이다. 자연은 단지 문을 닫고 미늘창을 내리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 안에서는 새로 들여놓은 선물을 풀어헤쳐 서랍에 넘치도록 가득가득 담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봄이다. 미래는 싹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와 함께 있지 않은 것은 장래에도 없으며, 우리의 눈에 싹이 보이지 않는 것은 흙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래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것은 그것이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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