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몰이 투쟁의 봉화를 올리다, 고성의 이호원

  • 입력 2012.10.15 13:47
  • 기자명 소설가 최용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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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고성군 마암면 두호리. 이 마을은 우리 농민운동사에 특별하게 기록된 곳이다. 갑오농민전쟁 이후 가장 크게 농민들이 일어났던 80년대 소몰이 투쟁에서 그 첫 번째 싸움이 일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88년의 추곡수매거부운동이 일어난 곳 역시 두호마을이다. 80여 가구, 성산 이 씨가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는 마을에서 우리밀살리기운동이 시작되기도 했다.

오랜 역사를 지닌 마을은 들어서면서부터 강한 인상이었다. 마을 입구에 작은 동산이 있는데 수백 그루의 소나무와 팽나무, 느티나무 등이 들어서 있었다. 숲의 이름은 민주동산이다. 시골 마을의 동산에 ‘민주’라는 이름을 단 곳을 과문한 나는 처음 보았다. 옛 농협 창고의 담벼락에는 각종 구호가 쓰여 있었다. 아마 농활을 왔던 대학생들이 써 놓은 듯, ‘통일 농업’이라는 큰 글씨가 인상적이었다. 두호마을은 농민운동의 기세가 드높던 80년대의 분위기를 아직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대를 증언해 줄 이호원 선생의 집은 민주동산 바로 곁에 있었다. 강인한 인상의 선생은 약간의 뇌졸중을 겪는 바람에 건강이 그다지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억력이 좋았고 무엇보다 자신의 삶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 동산의 나무 두어 그루가 부러지던 날, 선생은 억센 사투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 경남 고성에서 농민운동을 주도한 이호원 씨.

 

고향에서 키운 농민의 꿈

이호원은 1948년 생, 그러니까 우리 나이로 올해 65세다. 고향인 두호리에서 7대째 뿌리를 내리고 사는 토박이이다. 어렸을 때는 바다가 멀지 않아서 물고기를 잡기도 하고 마을 사람들도 반농반어의 생활을 했는데, 간척이 되고나서부터는 농촌마을이 되었다. 마을은 고성군에서 호당 경지면적이 가장 넓었다. 그래도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두어 집 빼고는 땟거리 걱정을 하며 살아야하는 고단한 삶이었다. 이호원은 머리가 좋고 부모님의 교육열도 있어서 농업고등학교까지 졸업할 수 있었다. 당시 농업고등학교면 요즘의 대학원 맞잡이였다. 농촌에서 최고 엘리트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제대로 농사를 지어 잘 살아보겠다는 큰 꿈이 있었다.

 2남 4녀인 집안의 장남이고 가업을 이어받는다는 생각이었기에 도시로 나간다거나 다른 일을 하겠다는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군으로 입대한 그는 월남전까지 참전하였다. 군대 생활은 고달팠지만 인생에서 제일 큰 수확(?)을 한 곳이기도 했다. 친하게 지내던 고참이 자기 처가에 놀러가자고 하여 따라갔다가 바로 그 집에서 평생 배필이 된 여자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이호원을 데리고 간 고참은 그와 동서지간이 되었다.

제대 후에 의욕적으로 농사에 매달리고 있는데, 하루는 이병철이 찾아왔다. 이병철은 가톨릭농민회에서 초기부터 활동하던 운동가이며 역시 두호마을에 살고 있었다. 그는 이호원에게 수원에서 하는 교육을 권했다. 그 전에도 마을 청년들과 4H나 마을운동 등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이호원이었다. 농촌에서 뿌리를 내리기로 작정한 이상, 어떻게 해서든 제대로 잘 사는 농민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이든 배우려는 의지가 늘 있었다. 적어도 생각과 말에서 남에게 뒤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병철이 권하는 교육이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채 이호원은 수원으로 갔다. 그가 간 곳은 크리스찬아카데미였고 그는 2기 수료생이 되었다. 7박 8일 동안의 교육은 이호원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아, 이게 새 세상이구나, 그랬어요. 인생을 이렇게 사는 방법도 있구나, 그런 걸 크게 깨달았지요. 교육을 다 받고 나니까, 여기에 목숨을 걸고 싶다는 생각까지 드는 거예요. 뭐랄까, 결연한 의지가 생겼다고나 할까.”

교육을 받은 내용은 머릿속에 가득 차 있는 것 같은데, 막상 사람들과 만나 설득하려다보면 오히려 말발이 먹히지 않기가 일쑤였다.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한 달간 교육을 가기도 하고 장상환 교수 등이 추천하는 책을 밤새워 읽고 또 읽으며 점점 생각이 명료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 년이 채 안 되어 이호원은 지역에서 농업 문제에 관한 박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 누구와 논쟁을 해도 백전백승이고 아직 깨우치지 못한 사람들을 교육해내는 데 발군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시작했던 이병철 등과 곧 두호리에 가농 분회를 결성하였다. 두호리의 농민들은 가파르게 의식이 깨어났다. 밤마다 모여 토론하고 교육한 덕분이었다. 두호리에서 제일 말을 못하는 사람도 다른 마을에 가면 제일 똑똑하다는 우스개 아닌 우스개가 생길 정도였다. 빨갱이 동네라는 소문도 파다하게 퍼져나갔다. 반공도 아닌 멸공이란 말을 국시처럼 받들던 시절이었다.

소몰이 투쟁

마을 주민의 90% 이상이 농민회로 조직되어 있던 마을이었으니, 투쟁의 불길이 치솟을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농민의 투쟁이 거의 항쟁 수준으로 발전한 소몰이 투쟁이 두호리에서 시작된 것은 그래서 우연이 아니었다. 1985년. 계속되는 정부의 살농정책으로 농민들의 분노는 점점 한계점을 향해 불타오르고 있었다. 외국의 농축산물이 마구 수입되면서 농업은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소값이 폭락하면서 2년간 키운 소가 60만원씩 적자가 나는 지경에 처했다. 그러나 농민에 대한 정책과 보상은 전혀 없는 상태였다.

이에 소를 몰고 시위에 나서는 일명 ‘소몰이 투쟁’이 기획되었다. 소몰이 투쟁은 여러 모로 획기적인 방식이었다. 이전에 주로 성당 안이나 실내에서 하던 집회와 달리 소를 몰고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가두로 진출하는 투쟁으로 변했고, 경찰도 소가 날뛸 것을 염려해 함부로 최루탄을 쏘지 못했다. 소몰이 투쟁은 농민들이 경찰 저지선을 쉽게 뚫고 나가 일반 농민과 지역 주민에게 정부의 농업정책과 농민의 억울함을 알리는 효과적인 방식이었다. 또한 언론을 통해 보는 도시민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두호 마을에서는 소몰이 투쟁을 시작하기 약 한 달 정도 준비가 진행되었다.

“밤 열두 시가 넘으면 회원들이 창고로 모였어요. 이 마을에도 공무원이 있고 관의 끄나풀이 있으니까, 보안을 위해서 그렇게 한 거요. 플래카드 만들고 유인물 찍고 하는 작업을 아주 극비리에 했는데 끝까지 비밀이 지켜졌어요. 그 때 썼던 구호가 ‘재벌은 돈밭에 농민은 똥밭에’ 뭐 이런 것도 있었고 하여튼 거사날로 잡은 7월 1일까지 밤마다 준비를 했어요.”

당시 99가구의 농가 모두 소를 키우고 있었고 분노는 폭발했다. 경운기와 수십 마리의 소를 앞세운 농민들이 고성군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5km 남짓 떨어진 고성 우시장이 목적지였다. 미처 정보를 파악하지 못한 경찰은 겨우 순경들이 나와 바리케이드를 쳤지만 분노한 농민들과 소를 막을 수는 없었다. 우시장에 집결한 농민들은 ‘소 피해 보상 및 외국 농축산물 수입 금지’라고 쓰인 대형 플래카드를 걸고 유인물을 살포했다. 지서장과 면장, 정보과 형사들이 나와서 저지하려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좀, 싱겁더라고. 한 번 대차게 붙을 줄 알았는데. 원래 우시장에서 시위를 하고 후퇴할 예정이었는데 너무 싱거운 거야. 그래서 군청으로 가자, 해서 군청으로 쳐들어가는데 그 때 전경들이 도착을 했어. 군청으로 가는 길이 막히고 싸움이 붙었지. 우리도 국도를 완전히 점거하고 몇 시간이나 도로가 완전히 마비되었지.”

결국 고성 군수가 농민들의 요구가 반영되도록 최선의 약속을 하고 농민들은 마을로 돌아왔다. 고성의 선도적이고 성공적인 투쟁은 전국 각지로 퍼져나가 수만 명의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는 소몰이 투쟁이 전개되었고, 당시 폭압적이고 반농민적인 전두환 정권의 본질을 폭로하는 데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이어진 투쟁과 삶의 아픔

 워낙 큰 싸움이라 구속을 각오했는데 농민들의 기세에 겁을 먹었는지 지역 경찰서 차원에서 대충 넘어가는 것이었다. 이어진 수세와 농지세 싸움에도 이호원은 앞장서서 싸웠다.

“내가 수세에 대해서 어릴 때부터 맺힌 게 있었어요. 아버지가 수세를 못 냈는데 그 놈을 받으려고 집에다 차압 딱지를 붙이는 거요. 가구며 그런데다가. 어린 마음에도 많이 성이 나더만.”

 농민들도 농사짓느라고 물을 썼으니까 수세를 내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는 분위기가 있었다. 워낙 오래 내오다보니 그렇게 생각이 굳어버린 것이었다. 이호원은 농민들에게 왜 수세를 폐지해야 하는지 쉽게 설명해주었다. 물은 일종의 사회간접자본이고 농업은 공익성이 크기 때문에 당연히 물을 무료로 사용해야 하고, 또한 오래 전에 만들어진 저수지의 물에 세금을 매기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설득했다. 게다가 수세는 도시의 수도세보다 비쌌기 때문에 농민들에게 커다란 부담이었다.

갑류, 을류 농지세도 마찬가지였다. 80년대의 투쟁을 통해 수세와 농지세를 폐지시킨 것은 농민운동의 커다란 성과이면서 농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다. 이는 다시 농민운동이 농민들 사이에서 뿌리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호원은 운동을 하면서 집안과 농사를 제대로 돌볼 수 없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하는 운동에 다른 곳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십 년 넘게 운동에 매달리다보니 빚더미에 올라앉고 말았다.

“내일 집회가 있어서 가야하는데 논에 멸구가 쫘악 퍼진 기라. 농약도 못 치고 집회에 갔다가 잡혀서 한 일주일 구류 살고 나와보니까, 논이 다 절단이 나버렸어. 그 해는 먹을 식량거리도 못 건졌으니까.”

운동에 따르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밤낮으로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당하고 주위 친지들도 아우성이었다. 하루는 늘 찾아오는 정보과 형사가 오토바이를 타고 찾아왔다. 둘이 옥신각신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마당에서 기어 다니던 어린 아들이 오토바이의 머플러를 잡고 말았다. 먼 길을 달려와 뜨겁게 달구어진 머플러를 여린 손이 잡자마자 그대로 쩍 달라붙고 말았다. 심한 화상을 입은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이호원은 경남농민회 의장을 비롯한 여러 자리를 맡아 일하면서 우리밀살리기운동에 적극 뛰어들었다. 고성에서 사라진 우리밀 씨를 처음으로 구해 시작된 우리밀살리기 사업은 점차 다른 지역으로 퍼져 이제는 많이 자리를 잡은 편이다. 이호원은 몇 해 전에 고성군이 선정한 ‘고성군민상’을 수상했다. 순전히 농민운동에 헌신했다는 이유로 군민상을 받은 경우는 아마 전국에서 그가 처음일 것이다. 이호원은 2남 2녀를 두었다. 그 중 장남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 농촌으로 돌아올 예정이었다. 이호원도 아들 중 누군가는 가업을 잇길 바랐다.

그런데 하늘도 무심한 엄청난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한창 귀농 준비를 하고 또 약혼녀도 있는 상태에서 스물일곱 살 꽃다운 나이의 아들은 다니던 회사에서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산재였다. 참척을 당했으나 어찌해볼 수 없는 운명이었다. 이호원은 산재 보상금으로 나온 1억원을 농민회에 기증하였다. 농업에 희망을 품은 아들의 목숨을 농민운동에 바친 것이었다. 이호원은 또 그 유명한 고성 오광대놀이를 크게 되살리고 세계에 알린 장본인이기도 하다.

일찍부터 오광대놀이에 숨겨진 지배, 피지배 계급의 문제, 그리고 상놈이 스스로 해방되는 형식을 눈 여겨 보기 시작했다. 그것을 농민운동과 연계된 민중 연희로 발전시키고자 그는 부단히 노력했다.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고 미국의 카네기홀을 비롯한 세계 30여개 국의 순회공연을 성공리에 마치기도 했다. 현재 오광대놀이 연희자 30여 명은 모두 실제 농사를 짓고 있는 농군들이다.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이면서 현실의 주인공들이 펼치는 공연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지금은 외국인들이 배우기 위해 전수관에 찾아오기도 한단다.

 “막내아들은 농사를 짓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 같아. 이제 내 대에서 끝났지, 뭐. 살아온 게 후회는 없는데, 인생이 쓸쓸하제.”

민주동산을 뒤로 하고 돌아오는 길에도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그의 쓸쓸한 마지막 말이 바람 속에 자꾸만 들려오는 듯했다. 글·소설가 최용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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